1989년 여름 어느 날 밤. 1시쯤이었다. 경기도 양평 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부대에서 갓 병장이 된 고참과 짝을 이뤄 보초를 섰다. 손가락 꼽으며 제대할 날을 헤아리기 시작한 고참이 입대한 지 두 달 남짓 된 나에게 “넌 며칠 남았냐? 어디 셀 수나 있겠냐”고 지근댔다. 작은 한숨으로 답답함을 삭이며 연병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작은 초록 불빛 서너 개가 이리저리 깝치는가 싶더니 이내 온 하늘을 뒤덮을 만큼 수가 늘었다.
“와…! 얘들이 왜 이래? 이렇게 많은 건 처음이네.”
반딧불이. 고참이 놀라 입을 떡 벌릴 정도로 밤하늘을 가득 채운 채 눈앞에 하늘하늘 흐르던 초록빛 군무를 잊을 수 없다. 안타깝지만 반딧불이 군무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1990년 중고참이 되어 맞은 양평의 여름 밤. 반디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1991년 제대를 앞둔 여름 밤. 혹시나 했지만, 반디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는 그냥 잊고 살았다.
2007년 가을.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 한국어판이 18년 전 반딧불이 군무를 그리는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인간이 없었다면, 조금 더 겸손했다면, 반디가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와이즈먼은 `한반도를 둘로 나눈 슬픔(휴전선)이 낳은 희한한 기적`을 보았다. 생지옥 같은 전쟁터였지만, 1953년 9월 6일부터 50년 이상 인간이 사라진 뒤 생물이 가득한 곳으로 변한 비무장지대(DMZ)를 본 것(260쪽)이다. 그는 폭 4㎞에 길이 241㎞인 비무장지대가 유전적으로 건강한 개체군이 성장하기엔 비좁지만, 세계가 교훈으로 삼기엔 충분히 넓은 것으로 풀어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비무장지대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유산이 될 뿐 아니라, 세계가 따를 수 있는 모범이 될 것(266쪽)”으로 내다봤다.
`인간 없는 세상`은 지구에 끼친 인간의 몹쓸 짓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지난 반세기 동안 생산한 플라스틱 총량이 10억톤을 넘어섰는데, 아직까지 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분해되지 않은 채 지구에 그대로 남았고, 계속 남을 것(180쪽)이다. 또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지더라도 흙에 섞인 아연이 모두 없어지려면 3700년이 걸린다. 3700년이면 인간이 청동기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225쪽)이다. 아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조비료의 불순물인 카드뮴은 7500년, 납은 3만5000년 뒤에나 사라진다.
끔찍한 건 더 있다. 플루토늄 무기(핵폭탄) 탄두가 녹는 데만 5000년이 걸리고, 그 속에 든 4~9㎏짜리 `플루토늄 239`는 12만5000년이 지나도 450g이 남는다. 이게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면 25만년쯤 걸릴 것(285쪽)이란다. 인간은 플루토늄 100만분의 1g만 마셔도 폐암에 걸린다. 그런데 핵탄두 하나도 아닌 플루토늄 핵발전소를 이미 441개(2007년 기준)나 만들었다. 지구에 `인간 없는 세상`이 와도, 여러 생물은 인간이 남긴 몹쓸 오염물을 오랫동안 끌어안아야 할 처지다.
인간…. 그동안 지구와 생물을 너무 괴롭혔다. 이제 겸손하게, 또 조용히 지구를 위할 때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인체 양분을 고스란히 땅에 돌려주는 것(333쪽)도 좋겠다.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국제팀장 e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