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값이 최고치 경신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국내에서 엔고를 바라보는 반응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예전에는 엔화가 강세를 보이면 한국 수출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금은 그러한 기대가 줄어들고 있다.
최근 엔고가 만들어진 배경과 원ㆍ달러 환율 움직임을 고려하면 엔화 강세에 따른 기대감은 크지 않은 상황이다.
18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85.47엔을 기록했다. 지난 11일 장중 한때 84엔까지 떨어졌지만 일본 중앙은행 개입 기대 속에 잠시 주춤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금 같은 엔화 움직임이라면 1995년 4월 달러당 79.75엔을 돌파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현재 엔고가 과거와 달리 일본 경제 잠재력을 반영했다기보다는 미국과 유럽 경제 악화로 인한 반사작용 결과라는 것이다. 지나친 엔화 약세를 바꾸기 위한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 미국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은 240엔대였다. 이후 엔화는 일본의 대규모 무역흑자와 경제성장 전망을 반영해 점진적인 강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 엔고는 일본의 과도한 무역흑자나 일본 경제의 건실함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세계 경제 불안정에 따라 달러와 유로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엔화에 수요가 몰렸을 뿐이다.
이에 덧붙여 중국 정부가 보유한 미국 국채를 해소하고 엔화표시채권 매입을 늘리면서 엔화 수요에 불을 붙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암암리에 엔고를 즐긴다는 시각도 있다. 유럽은 경제 회복을 위해 유로화 약세를 용인하고 있고,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최근 금리 동결로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 금리가 낮아지면 기존에 엔화를 저금리에 빌려 해외자산에 투자하는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가져와 상대적으로 엔고를 확산시킬 수 있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펀더멘털로 봤을 때는 엔화 강세가 다소 지나친 측면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을 선호하면서 엔화에 몰린 것"이라며 "중국이 미국에 협상력을 확보하기 위해 달러채를 털고 엔화채를 매입하고, 유럽은 경기 회복을 위해 유로 약세를 용인하는 등 복합적인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15년 만에 초유의 엔고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한국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예전만 못하다고 지적한다. 엔화에 대한 원화값은 100엔당 1370원대로 엔고에 큰 변화 없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엔ㆍ달러 환율과 원ㆍ달러 환율 움직임이 동조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문제다.
환율 흐름을 보면 과거 엔화가 강세일 때는 원화가 약세를 띠었는데 지금은 엔화 강세 속에 원화 강세가 동반되고 있다. 예컨대 2008년 12월 17일 엔화 환율은 달러당 87.8엔으로 당시 달러에 대한 원화값은 1325.0원이었다. 하지만 엔고 속에 18일 현재 원화값은 달러당 1174.2원을 기록하는 등 과거에 비해 강한 원화로 돌아섰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엔고와는 상관없이 지금 같은 위기에서는 한국 경제 전망에 대한 신뢰가 상대적으로 높아 달러 대비 원화가치도 높다"면서 "엔화와 원화가 동반 절상되는 상황에서는 한국 수출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가 예전에 비해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도 "엔화 강세로 갈 때 전통적으로 우리 수출기업은 이득을 봤지만 최근 일본은 디플레이션으로 물가가 낮아 제조 원가가 떨어지고 있어 엔고로 한국 수출기업이 반사이익을 크게 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경제적으로 엔고는 일본 대외구매력을 높이는 것이 보편적이다. 일본 기업들이 1980년대 후반부터 엔고를 겪으면서 세계 인수ㆍ합병(M&A) 시장 큰손으로 주목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이 80년대 록펠러센터와 컬럼비아픽처스를, 2000년에는 도시바가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한 것 등은 엔고로 인한 구매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 사정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지적이 많다.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엔고로 일본 기업들 대외구매력은 커졌지만 수출 악화로 기업 펀더멘털이 취약해져 과거 문어발식 M&A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일본 중앙은행 개입 등으로 엔화 약세로 반전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해외 자산 매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들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기업들이 엔고로 매입한 해외자산을 팔았을 때 향후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엔화의 해외자산 매입이 계속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매일경제 김병호 기자 / 박용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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