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62억달러에 달했던 미국 벤처펀드 결성규모는 지난해 158억달러까지 줄어들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2007년 9626억원에서 지난해는 1조4153억원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미국이 반토막나는 동안 우리나라는 50%가량 증가한 셈이다. 이 같은 한미 벤처펀드 결성 규모 차별화 배경으로는 전적으로 모태펀드를 꼽는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은 벤처펀드로 올 자본이 대거 안전자산으로 이동한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벤처산업의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정부가 대거 예산을 투입했고 그 결과 벤처펀드 결성이 크게 활기를 띤 것이다.
◇제2의 벤처 붐 중심, 모태펀드=지난해 벤처펀드 결성규모 1조4153억원은 벤처 붐이 절정을 이뤘던 2000년 1조4341억원 이후 최대 규모다. 2000년 이후 벤처 버블이 일시에 제거되며 2003년 6790억원까지 축소됐던 벤처펀드 결성규모는 2005년부터 서서히 규모를 키우면서 2008년 1조원대에 다시 진입했다. 벤처펀드 결성규모가 증가를 나타내기 시작한 2005년은 바로 정부 모태펀드가 출범한 해다. 당시 1조원을 목표로 출범했던 모태펀드는 첫해인 2005년 1701억원을 시작으로 2006년 2150억원으로 늘었으며 글로벌 경기침체기인 2009년 3380억원 대거 결성되며 목표치인 1조원을 돌파했다. 정부는 목표 달성 이후에도 모태펀드를 계속 늘려나가고 있다. 민관 매칭으로 조성해 정부의 정책적 목적과 민간의 수익창출 목적 두 가지를 달성할 수 있어서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한국 제2기 벤처시대 출발에 가장 적합하다는 데 한목소리다. 그리고 그 요인 가운데 하나로 모태펀드 지원으로 막대한 벤처펀드 결성된 점을 꼽는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글로벌 경기침체로 벤처펀드 결성이 부진해 기대만큼의 투자를 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결성한 펀드들이 많아서 새롭게 등장하는 벤처기업 투자에 상당한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흔히 하는 말로 투자를 위한 총탄이 장전된 상태다.
◇5년 만에 5조원 돌파=민관 매칭의 힘은 대단하다. 올해 누적 기준으로 모태펀드 출자로 결성한 벤처펀드 규모가 5조원을 넘어선다. 이달 20일 현재 결성된 벤처펀드규모는 4조4472억원. 여기에 모태펀드 출자가 확정돼 결성이 추진 중인 펀드가 7270억원이다. 이들 펀드가 예상대로 출범할 경우 5조원을 돌파한다. 20일 현재 기준으로 정부가 모태펀드를 통해 출자한 규모는 1조2285억원이다. 투자 대비 3.6배의 효과를 본 셈이다.
연도별로 보면 첫해인 2005년에 6754억원 결성을 시작으로 2006년 6093억원, 2007년 8844억원, 2008년 5140억원이 결성됐다. 지난해에는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서 벤처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예산을 확대 집행해 결성 규모가 1조2421억원으로 늘었다. 올해 들어서도 7월 말 기준으로 5220억원의 펀드가 결성돼 투자에 돌입했다.
◇강력해진 모태펀드 파워=모태펀드가 출자한 펀드 수와 규모는 자연스럽게 급증했다. 국내 벤처펀드시장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막대해진 것이다. 실태를 보면 전체 신규결성 벤처펀드 가운데 모태펀드 출자 펀드 비중은 지난해 74개 가운데 52개로 70.3%에 달했다. 벤처투자시장에서 모태펀드 출자펀드가 차지하는 비중도 올해 5월말 기준으로 62.0%에 이른다. 한국벤처투자 측은 올해 전체적으로 이 비중이 70%에 육박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모태펀드 출자 펀드의 투자규모도 매년 크게 늘고 있다. 상반기를 기준으로 할 때 2008년 1964억원에 불과했으나, 지난해는 2434억원으로 늘었으며, 올해 들어서는 전년보다 50% 증가한 3655억원을 나타냈다. 경기 회복기에 맞춰 그동안 상당한 펀드를 결성한 벤처캐피털업계가 서서히 투자규모를 늘린 것이다. 성기홍 한국벤처투자 투자운용본부장은 “지난해 모태펀드 지원을 토대로 대규모로 조성된 벤처펀드의 투자활동이 왕성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이 같은 모태펀드 출자가 늘고 있는 가운데 한국벤처투자 측에서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모태펀드 출자펀드의 투자사 269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 기업의 고용증가율과 매출증가율이 각각 1년 전과 비교해 35%와 63.6%에 달할 정도로 크게 개선된 것이다. 벤처기업이 투자유치에 성공했다면 외형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증가율 측면에서는 놀랍다고 할 수 있다.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지난해 말부터 정부는 `제2기 벤처시대 개막`을 목표로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정책 효과도 여럿 나타나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뭔가 허전함을 떨치지 못한다. 바로 청년 창업의 부진이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2000년 20 · 30대 청년 창업 비중은 54%에 달했으나 2008년 기준으로는 그 비중이 12%까지 떨어졌다. 그 이후에도 이 비중은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의 배경으로는 코스닥 진입의 어려움도 꼽지만 무엇보다 벤처캐피털 업계의 보수적 투자경향도 이유로 든다.
과거 벤처 버블 제거 이후 벤처캐피털 업계는 내부적으로 투자요건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당연히 성장성이 명확하지 않은 초기 벤처에 돌아가는 자금이 줄어들었다. 코스닥 진입 장벽이 높아지면서 업력이 10년 안팎은 돼야 하는 것도 역시 벤처캐피털이 쉽사리 초기 투자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신생 벤처기업이 지속적으로 탄생하지 않으면 우리 벤처산업의 미래는 없다. 모태펀드 출자 펀드의 초기 투자비중은 올해 5월 말 현재 작년 24.3%에 비해 소폭 늘어난 30.8%지만 여전히 그리 높지 않다.
정책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들 초기 벤처기업을 모태펀드 출자펀드가 챙겨야 한다. 물론 잠재력 있는 기업에는 코스닥시장이 상장요건을 완화하는 등의 대책도 뒤따라야 한다. 동시에 모태펀드가 정책적 목표를 수행한다는 측면에서는 보다 투자에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다행히 모태펀드를 관리 · 운영하는 한국벤처투자는 앞으로 창업초기펀드 챙기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창업초기펀드 출자 재원을 우선 확보해 출자 비중을 늘리고, 창업초기기업 투자전문 벤처캐피털 육성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한국벤처투자는 이 밖에 모태펀드 운용방향으로 `전문성 강화`와 `글로벌 역량 강화`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이를 위해 심사기준을 개선해 자펀드의 운용 수익률 심사 비중을 높이고, 펀드 운용의 전문성과 특성화 평가를 강화한다. 또 산업현장 트렌드를 펀드 운용에 반영하기 위해 모태펀드 자펀드가 출자한 벤처기업의 애로사항을 청취해 지원 방안을 찾기로 했다. 이와 함께 모태펀드 출자펀드의 글로벌 역량을 높이기 위해 국내외 벤처캐피털업체 간 네트워크 구축 지원에서도 나선다. 이는 해외 투자자금 유치 및 해외 투자 지역 확대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게 한국벤처투자 측의 설명이다.
◆<미니인터뷰>김형기 한국벤처투자 사장
“명칭 그대로 제2기 벤처 붐의 산파 역할을 할 것입니다.”
김형기 한국벤처투자 사장은 모태펀드가 한국 벤처산업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김 사장은 “지금은 이전 벤처 붐에 이어서 10년 만에 찾아온 벤처업계에 좋은 기회”라며 “글로벌 금융위기가 오히려 우리 벤처업계에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발 금융위기 속에서 추가경정예산까지 편성하며 지난해에 모태펀드 지원으로 25개 7061억원 규모의 펀드가 결성됐으며, 경기회복기 국내 벤처기업들에는 좋은 재원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모태펀드 출자 펀드에 대한 관리에 더욱 철저히 나서겠다는 방침도 명확히 했다.
“2000년 벤처 열풍이 불 당시 벤처캐피털업체들이 충분히 실패의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출자한 펀드들이 엄선된 곳에 투자할 수 있도록 감독을 강화할 것입니다.”
일부에서 지적하는 초기 벤처 투자 부진의 대책 마련 계획도 밝혔다.
김 사장은 “초기 전문 투자펀드에는 가산점을 부여하고, 출자비율을 우대하며 또한 출자재원을 우선 배정하는 등 펀드 결성을 촉진할 것”이라며 “앞으로 장기적으로 초기기업에 대한 투자와 사후관리를 전문적으로 추진하는 창투사를 육성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해외 자금의 국내 유치에도 관심을 보였다. 국내 벤처펀드 투자재원으로의 활용뿐만 아니라 국내 벤처캐피털의 글로벌화 그리고 이들이 투자한 벤처기업의 해외진출 기회를 맞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을 그 배경으로 들었다.
“벤처기업뿐만 아니라 벤처캐피털도 글로벌화가 아니면 답이 없습니다. 벤처캐피털이 투자만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투자를 하면서 동시에 벤처기업의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해외 마케팅을 연결시켜주는 등 벤처캐피털이 벤처기업의 비즈니스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한국 벤처산업과 벤처캐피털산업의 발전에 대한 제언도 아끼지 않았다.
“대 · 중소기업 상생은 중요합니다. 대기업의 축적된 노하우를 통해 중소벤처기업의 성장지원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대기업 지원을 바탕으로 혁신형 강소기업이 해외에서 역량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또 “엔젤투자가 활성화돼야 한다”며 “성공한 벤처기업가, 네트워크와 전문지식을 갖춘 전문가 등이 엔젤투자자로 나서서 사업 성공을 위한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모태펀드 전성시대 열렸다.
모태펀드란 기업이 아닌 벤처기업 투자를 목적으로 결성되는 벤처펀드에 투자하는 펀드다. 그래서 펀드를 위한 펀드(Fund of Funds)로 불린다.
국내에는 일반적으로 모태펀드를 중소기업청 주도로 만들어 한국벤처투자가 관리 · 운영 중인 펀드를 말한다. 하지만 이의 정확한 명칭은 `중소기업모태펀드`다. 중소기업모태펀드에 앞서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가 2003년부터 3년간 한국IT펀드(KIF)를 결성해 운영했으며 올해 들어서도 추가로 펀드를 조성 중이다.
이들 이외에 지난해 지식경제부가 `신성장동력 투자펀드`를 결성했으며, 올해 농림수산식품부도 `농식품모태펀드`를 결성해 출자를 추진 중이다. 이 가운데 신성장동력 투자펀드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 펀드는 국내 선두벤처기업에 150억원 안팎의 비교적 큰 규모 투자를 한다. 이를 통해 차별화된 기업가치 제고와 글로벌 진출 지원을 도모하겠다는 것으로, 신성장동력 투자펀드 운용사는 투자와 함께 벤처기업 경영에 적극 참여한다. 첨단융합 분야 신성장동력 투자펀드를 운용 중인 스틱인베스트먼트의 이상복 전무는 “신성장동력분야의 강소기업을 발굴해 해외진출을 도와 글로벌 중핵기업으로 만들 것”이라며 “기존 벤처펀드와는 다르게 투자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녹색성장 2개, 첨단융합 2개, 바이오펀드 1개 등 총 5개의 펀드를 결성했으며 조만간 2개의 펀드가 추가로 출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