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그리드를 직역하면 똑똑한 전력망이다. 기존 전력망에 정보기술(IT)을 입힌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기존 홈네트워크와 전력시장에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전력IT 서비스가 혼합된 개념으로 이해하면 쉽다.
실시간 전기요금제가 기본이기 때문에 시간대별 요금이 달라 소비자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태양광이나 풍력을 이용해 생산한 전기를 시장에 내다팔 수도 있다. 전력저장장치의 등장으로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전력을 저장할 수 있어 필요한 때 전력을 사용할 수 있다. 또 불규칙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신재생에너지원도 계통과 연계해 쓸 수 있다.
전력과 IT의 결합으로 전력시장뿐만 아니라 국민의 삶 전반에 걸쳐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난 5월말로 제주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 1차 연도 사업이 끝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진화된 스마트그리드를 구현하게 될 전망이다.
우리나라를 휩쓸고 간 태풍 `곤파스`가 제주도에 상륙한 날 아침,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를 찾았다. 태풍 곤파스가 남해로 근접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김포발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구름 위를 날다 착륙할 때가 되니 강한 바람에 기체가 요동을 친다. 태풍을 거슬러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태풍이 제주도에 들이닥치기 전 실증단지를 둘러봐야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자동차를 타고 실증단지인 구좌읍 김녕 지역으로 이동했다. 한 시간 남짓 거리다. 간혹 길거리에 세워진 작은 표지판만이 이곳이 실증단지와 관계돼 있음을 알게 한다.
◇터치 한 번이면 `OK`=김녕은 전형적인 어촌 마을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부 주택 위에 태양광 발전설비가 설치돼 있다는 것뿐이다.
SK텔레콤이 스마트 플레이스를 실증하는 한성수씨(66) 댁에 들렀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거실 한 가운데 있는 스마트미터 디스플레이(IHD:In Home Display)다. 언뜻 PMP처럼 생겼다. 7인치 정도의 화면에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인터페이스는 직관적이다.
터치패드로 화면을 건드리자 메뉴가 뜬다. 스마트 소켓과 연결된 개별 가전기기를 게이트웨이(인터넷 통신장비)를 통해 IHD에서 제어할 수 있다. 선풍기는 물론 안방의 TV까지도 터치 한 번이면 `OK`다.
스마트 소켓은 스마트 가전이 등장하기 전 과도기적인 형태로 화면을 통해 가전제품의 전기 사용량을 표시하고 해당 정보를 지그비로 게이트웨이에 보낸다.
스마트 소켓에 있는 램프는 전력사용량을 나타낸다. 평상 시 녹색에서 전력사용량이 많아지면 점차 적색으로 변해 사용자들이 전력을 효율적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게 SKT 측 설명이다.
개별 제품의 현재 전기 사용량은 물론 누적 전기사용량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최대 6개월까지의 전력 사용량을 확인할 수 있다. 실시간 요금제가 마련되지 않아 사용량에 따른 전기요금을 알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SKT는 가구별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부여해 홈페이지(www.sksmartgrid.com)에 접속, 외부에서도 모든 기능을 제어하고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곽승현 SK텔레콤 매니저는 “내년 5월말 관련 인프라 구축이 끝나면 6월부터는 실시간 요금제를 도입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태양광발전으로 한 달 전기료 `0원`=옥상에 올라가면 큰 돗자리만한 태양광 발전설비가 설치돼 있다. SKT에 따르면 이곳 실증단지에 설치된 태양광발전설비는 총 100개다.
가구당 3㎾규모로 LS산전의 모듈을 사용했다. 일조량이 좋아 한달 평균 30~60㎾h의 전력을 더 생산한다. 한 달에 350㎾h의 전력 생산을 기준으로 하면 월별로 4만5000원 정도의 전기료를 아끼는 셈이다. 전력사용량이 많은 가구의 경우 누진제 적용을 받기 때문에 절감효과는 더 크다.
태양빛이 좋은 낮에는 사용량보다 생산량이 많아 대문 옆에 달린 스마트 미터가 거꾸로 돌아가기도 한다. TV시청료를 포함해 기본료만 내고 쓰는 셈 이다. 한성수씨는 태양광발전설비를 설치한 후 에어컨을 들여놨다고 한다.
한성수씨는 “태양광발전설비로 전기료 부담도 적고 IHD로 가전제품도 켰다 끌 수도 있어 매우 편리하다”면서도 “(태양광 발전설비에 따른)전기요금 경감효과를 확인하는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음 · 공해 걱정 끝=자리를 제주 첨단과학단지로 옮겼다. 비와 바람이 더 세졌다. 전기자동차를 시승하러 가는 길이라 걱정이 앞선다. 비가 오는 날에도 충전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시승차량은 두 종류다. 도심형 저속전기차로 나온 CT&T의 `e-ZONE`과 기아 `모닝`을 개조한 차량이다. 둘 다 SK에너지의 배터리가 적용됐다.
시승에 앞서 충전을 했다. 충전은 인증된 카드를 발급 받아야만 할 수 있다. 인증카드를 충전스탠드에 갖다 대니 충전기 연결 부위가 드러났다. 스탠드 내부에 있어 비가 내려도 안전하다는 게 안내를 맡은 안규찬 SK에너지 부장의 설명이다.
차 트렁크에서 충전커넥터 케이블세트를 연결하면 충전준비 끝이다. 스탠드의 터치화면을 건드리자 충전이 시작된다. 충전 과정이 표시돼 쉽게 알 수 있다.
저속 타입이라 대형 마트 등에서 충전 플러그를 꽂아 놓고 장을 보고 오는 사이에 충전이 될 것 같다. 요금은 빌링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정산된다.
충전을 끝내고 모닝 차량에 올랐다. 수작업을 한 차량이라 뒷자리에 배터리가 들어 앉아있다. 한 번 충전으로 100㎞ 이상을 달릴 수 있다.
시동키를 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계기판에 들어온 램프만이 출발 준비가 됐음을 알린다.
액셀을 밟아도 마찬가지다. 소음도 진동도 없다. 무단 변속기라 기어 노브 부분에 드라이브(D)와 후진(R), 정차(P) 밖에 없다. 최대 분당 회전수(RPM)는 9000에 달한다. 가다 서면 모터도 정지된다. 물로 냉각하는 방식이라 물을 순환하는데 필요한 모터소리만 나지막이 들릴 뿐이다.
◇라이프스타일 패러다임의 전환=짧은 시간 동안 돌아본 것이지만 제주 실증단지는 지금까지의 우리 삶과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여줬고 현실적인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핵심은 전기공급자와 수요자간의 양방향 통신과 전기 저장이다. 우선 제공되는 모든 서비스는 양방향 통신이 기본이다. 전기공급자의 원가 정보 공개로 실시간 요금제가 도입돼 소비자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다. 소비자들의 전기 사용 패턴을 전기공급자에 제공해 가장 이상적인 전력 소비 패턴을 일러주기도 한다. 전력 거래시스템으로 가정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설비에서 생산된 전력을 시장에 팔수도 있다. 이 모든 건 IHD 하나로 해결된다.
또 전력 저장장치의 등장은 전력 피크를 분산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재생에너지를 전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생산된 전력을 필요한 때에 가져다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헐적으로 생산되는 신재생에너지 전원을 저장했다가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SKT는 이러한 에너지원을 모아 하나의 전기공급자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전기차의 출현도 전력저장장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마트 그리드는 단순히 지능형 전력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응용분야와 사업기회가 존재한다. 소비자들은 적당한 대가를 치르고 이를 활용하게 될 것이다. 마치 아이튠즈나 안드로이드 마켓을 통해 공급자와 소비자가 하나의 생태계를 이뤄 발전해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관건은 구축된 스마트 그리드를 이용해 누가 얼마나 유용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느냐에 달렸다.
제주=유창선기자 yuda@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