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에서 벤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세기 기업의 경쟁력이 대규모 생산과 저비용 구조 확보에서 결정됐다면, 21세기는 혁신과 융합에 기반한 `창의(創意)`가 기업 성패의 가늠자가 됐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대 · 중소기업들이 20세기 대한민국 성장신화를 쓴 주역이었다면, 21세기 글로벌 시장에서 스마트 대한민국의 위상을 뿌리내릴 주자들은 바로 벤처기업들이라는 기대감이 한층 더 높아졌다.
우리나라 벤처는 아직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정보기술(IT) 인프라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벤처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갑작스레 불어닥친 외환위기 이후 창업전선에 나선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정부의 벤처 육성정책이 맞물리면서 2000년을 전후해 벤처붐은 정점을 이뤘다.
그 후로 10년이 지난 현재,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총개수는 2만개, 연간 100조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생태계가 형성됐다. 그럼에도 아직 그 역사는 15년 안팎으로 일천하고, 창업→투자 확보→세계화→지분 매각→재창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최근 들어 벤처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벤처 전략을 세우자는 주장이 물밀듯 거세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벤처 1.0과 2.0 세대를 제대로 구분해 새로운 시장 패러다임에 맞는 전략과 전술, 정책을 수립하자는 의견도 큰 공감대를 이뤄가고 있다.
벤처 1.0과 2.0은 여러 가지 기준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벤처기업들이 공통의 이해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협회를 만들었던 1995년부터 벤처 재도약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던 2004년까지를 벤처 1기, 벤처 1.0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벤처기업들은 도전정신 하나만으로 불모지에 뛰어든 초기 개척자들이다. 투자 유치라든지, 법적·정책적 뒷받침을 받을 수 있는 인프라도 없는 상태에서 기술 하나만 믿고 과감히 창업에 나선 이들이다.
이들의 주된 사업 아이템은 IT제조였다. MPEG보드, MP3플레이어, 소형 디스플레이 구동IC 등 1990년대 중반 인기를 모았던 멀티미디어 음향·영상기기, 네트워크기기, 휴대형 정보기기 등과 관련된 부품이나 소형 완제품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업들은 빠르게 뒤쫓아오는 중국에 밀려 경쟁력을 잃으면서 실패로 끝난 벤처를 양산하게 됐다.
벤처 1.0 시대의 기업들은 코스닥을 통해 최종 평가를 받았다. 기술 개발과 초기 투자금 회수는 코스닥 시장에서 지분을 매각해 거둬들였다. 1996년 개장해 꼭 10년을 활동하고 한국증권선물거래소로 통합돼 사라졌지만, 코스닥시장은 이 시기 벤처기업들에게는 투자와 자금회수의 유일한 길이었다. 다만 초기 투자에서부터 자금을 회수하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면서 많은 수의 기업이 중도하차하는 불운을 겪었다.
벤처 1.0 시대를 겪으면서 가장 큰 걸림돌과 애로점으로 지적된 것들이 바로 연대보증제도다. 한번 창업한 기업가들이 실패할 경우 곧바로 신용불량자가 되는 구조적 장애물을 제거해야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벤처 2.0은 벤처 1.0과 구분해 21세기 벤처의 새 조류, 새로운 전략적 방향을 규정하기 위해 등장한 신조어다. 앞선 세대의 과오를 반성하고, 유효한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선언이다.
이민화 기업호민관은 벤처 2.0을 규정하는 네 가지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우선 벤처 2.0 기업은 기술과 시장을 결합시키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이 필수적이다. 벤처 1.0이 단일 기업의 독자적인 기술로 승부를 걸었다면 기술과 시장의 변화가 광속(光速) 수준으로 빨라진 21세기에는 여러 기업이 함께 기술과 시장을 결합시켜 상생하는 모델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벤처와 벤처 간일 수도 있고, 벤처와 대기업일 수도 있다.
두 번째로는 주력 제품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다. 제조업 중심의 IT에서 벗어나 서비스와 결합하는 IT 융합으로 이동해야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수요와 시장이 급팽창하고 있는 모바일 분야에 IT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서비스산업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한다는 생각이다.
그 다음으로는 자금 조달과 회수에서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벤처 1.0이 코스닥 중심의 최종 회수 시장에 머물렀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위험 부담이 많은 만큼 중간 회수가 가능한 자금 조달 방안을 마련한다면 엔젤 투자, 인수합병(M&A) 등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 제도적 뒷받침을 제안했다. 벤처 창업에 도전했다 실패해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으로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벤처가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를 살리는 주역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21세기 대한민국 혁신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정신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벤처 1.0 시대를 겪으면서 쌓았던 고귀한 경험을 바탕으로 벤처 2.0 시대를 열어가는 제도적·정책적 뒷받침과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더 큰 대한민국, 선진 일류국가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