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이책은 죽었다.”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매사추세스공대 교수의 말이다. 그는 지난 8월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주제로 한 콘퍼런스에서 종이 시대가 곧 막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네그로폰테 교수는 종이신문도 5년 안에 곧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미래학과 미디어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이름난 그의 발언에 관련 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아직 종이책은 도서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장과 휴대를 위해 종이책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향후 펼쳐질 미래에 대해 고민을 안겨줬다.
#2. 얼마 전 옥스퍼드 대학출판부는 앞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인쇄판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니겔 포트우드 CEO는 “인쇄판 사전 시장이 연간 수십 퍼센트씩 줄고 있다”며 “앞으로 나올 제3판은 인쇄판 대신 온라인판으로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사전 인쇄에 드는 비용에 비해 판매 수익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온라인판 수요는 점차 증가하고 있다. 제2판의 인쇄판 판매량은 21년간 3만질 정도였지만, 온라인 유료 가입자의 방문은 한 달 평균 200만회에 달했다. 한 질에 1165달러인 인쇄판과 비교해 연간 372달러를 내야 하는 온라인 사용자를 통해 거둬들이는 수익이 더 많다는 증거다.
◇아마존 `킨들`이 불러온 전자책 폭풍=많은 이들은 이와 같은 변화의 중심에 아마존 `킨들`이 있다고 말한다. 절대 대세를 빼앗기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던 종이책이 킨들의 등장 이후 점차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킨들은 2007년 11월에 처음 대중에 발매됐다. 이후 만 3년, 세상은 출판계와 미디어업계 종사자들이 자신의 미래를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달라졌다. 뉴욕타임스는 향후 10년 내에 전체 도서 중 종이책의 비율은 4분의 1에 머무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킨들은 전자책 단말기의 시초가 아니다. 지금은 e잉크 단말기의 대표주자로 평가받는 킨들이지만, 이전에도 몇 종의 e잉크 단말기가 이미 소비자를 찾았다. 첫 번째 e잉크 기반 단말기는 2004년 나온 소니의 `리브리에`다. 2006년 `PRS-500`이 뒤를 이었다.
이 제품은 출시 초기에는 호응을 얻는 듯 보였으나 70~80% 정도로 책정된 콘텐츠 가격을 소비자들이 외면하면서 조금씩 잊혀졌다. 컴퓨터와 USB 케이블로 연결해야만 콘텐츠를 내려 받을 수 있다는 점, 구입한 콘텐츠는 60일 이후 자동 삭제된다는 점은 고객의 마음을 얻기 힘들게 했다.
약 1년 후 발매된 킨들은 여러 면에서 혁신적인 시도를 선보였다. 통신망을 이용해 콘텐츠를 내려 받을 수 있게 해, 언제 어디서나 고객이 원하는 전자책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침이면 받아볼 수 있는 신문 서비스도 제공했다. 잡지도 정기적으로 자동 내려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소비자는 통신비용을 따로 부담하지 않아도 됐다. 단말기 가격에 통신비를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콘텐츠 가격 역시 저렴했다. 당시 일반 페이퍼북이 30달러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해 킨들용 전자책은 9.99달러로 약 3분의 1수준이었다. 비용이나 휴대의 부담 없이 도서를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킨들을 바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려놓았다. 킨들은 출시 후 2년 만에 300만대 넘게 팔렸고,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비자가 찾는 전자책 단말기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킨들의 성공에 일부 작가들은 앞다퉈 종이책과 전자책 동시 출간을 시도했다. 지난해 9월 출간된 댄 브라운의 소설 `로스트 심벌(The Lost of Symbol)`은 킨들 스토어에서만 1주일 만에 10만권 이상 내려 받기가 이뤄졌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류도 최근 자신의 장편 소설 `노래하는 고래`를 종이책에 앞서 전자책으로 먼저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국내 전자책 시장은 아직 `걸음마`=아마존이 `킨들3`를 낼 정도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지만 국내 전자책 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단말기 시장의 경우, 올해 들어 다양한 기기가 출시됐으나 판매량은 많지 않다. 모두 합쳐 5만대 정도다. 지난해 `파피루스`를 시작으로 지난 2월에도 신제품을 내놨던 삼성전자는 e잉크 기반 단말기 생산을 접었고, 대기업 중에서는 유일하게 LG이노텍이 인터파크의 `비스킷`을 생산하고 있다.
나머지는 중소기업이 맡고 있다. 네오럭스가 `누트` 시리즈를 내놓고 있으며, 넥스트파피루스가 `페이지원`을 생산한다. 서전미디어텍은 주문자상표부착(OEM)으로 북큐브네트웍스에 단말기를 공급한다. 지난해부터 단말기 판매를 시작한 아이리버는 국내 시장보다 유럽 · 중국에서 더 많은 기기를 판매한다.
단말기 판매가 저조한 이유로는 단말기 가격이 높고, 콘텐츠의 수가 적다는 점이 주요 이유로 꼽힌다. 올 상반기에 출시된 단말기는 대부분 30만원대로 가격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최신 콘텐츠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은 소비자의 주요 불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출판사는 복제 · 정산의 우려 등을 이유로 콘텐츠 공급에 난색을 표했다. 이에 국내에서 아마존과 같은 종이책 · 전자책 동시 출간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용 단말기의 판매량이 기대에 못 미치다보니 콘텐츠 생산 · 유통 업체들도 투자를 이어가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일부 업체는 전용 단말기와 함께 가려던 계획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아마존 킨들과 유사한 모델을 구축하려했던 인터파크는 단말기 판매량이 저조하자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콘텐츠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교보문고는 PC · 전용 단말기를 통한 콘텐츠 판매보다 스마트폰에서 팔리는 콘텐츠가 더 많아지자 삼성전자와의 제휴를 확대하는 추세다.
아울러 아이패드 · 갤럭시탭 등 태블릿PC 출시에 따른 기대감으로 전자책 시장은 이들 기기에 특화된 콘텐츠 시장에 집중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KT · SKT 등 통신사업자도 태블릿PC를 이용한 전자책 시장의 성장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e잉크 기반의 전자책 단말기 시장은 채 `만개`하기 전에 시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는 상황이다.
◇관건은 플랫폼이다=일본의 IT 저널리스트 사사키 도시나오는 그의 저서 `전자책의 충격`에서 “하드웨어의 비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기술이 점점 진화함에 따라 e잉크 화면도 조만간 컬러를 지원할 것이고, 동영상 재생도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게 주장의 근거다.
대신 그는 `플랫폼`에 주목했다. 그가 제시한 플랫폼의 요건은 △많은 베스트셀러를 갖추고 있을 것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 알지는 못하지만 읽어 보면 재미있을 만한 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 △이러한 책을 빠르고 간단하게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최적의 기기를 사용하면서 기분 좋은 환경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할 것 등이다.
다시 말해 “쾌적한 독서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면, 리더(단말기) 자체의 기계적 완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도시나오의 생각을 반영하듯, 국내 시장은 플랫폼을 잡기 위한 치열한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2005년 전자책 사업을 시작한 교보문고는 PC · e잉크 단말기 · 스마트폰 · 태블릿PC 등 단말기에 따라 포맷을 달리 하는 `멀티포맷` 전략을 취하고 있다.
단말기 제조 · 판매가 중심인 아이리버 · 네오럭스 등은 전용 사이트를 구축해 콘텐츠 유통에도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인터파크와 북큐브네트웍스는 단말기 판매를 이어가는 동시에 스마트폰 · 태블릿PC에 장착되는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해 한 번 구매한 콘텐츠를 여러 기기에서 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작가들의 행보도 관심거리다. 이제껏 출판사를 경유해 책을 출간했던 관행을 버리고 직접 전자책 유통업체와 접촉하는 흐름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소설가 박범신씨는 지난 4월 `은교`를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동시 출간했다.
과거 출판사를 잡지 못해 기회를 얻지 못했던 아마추어 작가들도 `1인 출간`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출간을 고민하고 있다. 교육용 콘텐츠를 주로 생산해 온 출판사들은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전자책 시장 진입을 노리고 있다. 웅진씽크빅 · 예림당 · 교원 등이 이와 같은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다소 보수적이었던 출판사들도 유통업체들과의 접촉을 강화하고 있다. 문학동네는 북큐브네트웍스에 전자책 콘텐츠를 공급하기로 했다.
장기영 한국전자출판협회 사무국장은 “전용 단말기 · 태블릿PC 등으로 전자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결국 전자책 시장은 국내에서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창규기자 k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