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 시작과 끝] <17> CDMA뒷이야기

정보통신부가 PCS접속방식을 CDMA단일표준으로 결정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미국은 칼라힐스를 앞세워 정부의 정책변경을 압박했다. 기업들도 당초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 과정에 뒷이야기가 많았다. 급박했던 막전막후의 커튼을 들쳐보자.

1995년 10월초 어느날.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승수 대통령비서실장과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이 배석자 없이 만났다. 한 실장 요청으로 이뤄진 오찬자리였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얼굴에 미소가 흘렀지만 서로 속내는 복잡했다. 한 실장은 CDMA방식을 고집하는 경 장관을 설득하려 했다. 경 장관은 CDMA방식의 당위를 확실하게 한 실장에게 못박고자 했다. 동상이몽의 자리라고 할까.

한 실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정부가 CDMA를 단일표준으로 고집할 이유가 있습니까. 국가 전체로 볼 때 가능하면 칼라힐스의 요구를 들어 줄수 있으면 들어 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국익 차원에서 이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해 주십시오.”

한 실장은 칼라힐스와 교분이 두터웠다. 한 실장이 주미대사시절 칼라힐스는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였다. 대표를 물러난 칼라힐스는 신세기통신 지분 11.45%를 가진 미국 에어터치사의 법률고문으로 일했다. 그는 10월초 내한해 청와대와 경제기획원, 상공부를 오가며 신세기통신에 대해 TDMA방식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경 장관이 정통부 입장을 설명했다.

“정통부로서는 칼라힐스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요구를 들어주면 우리가 국책사업으로 애써 개발한 CDMA기술은 사장(死藏)되고 말 것입니다. CDMA기술을 우리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면 한국은 기술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기술을 도입하고 국책사업으로 추진중인 정통부가 어떻게 이 일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칼라힐스가 이 문제를 가지고 불공정 무역 행위로 제소라도 하면 한미관계가 아주 껄끄럽게 됩니다. 이 문제는 국익차원에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당연히 국익을 최우선 고려해야 합니다. 정통부는 국익을 위해 CDMA개발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한 실장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역력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과 통상문제 등을 생각하면 칼라힐스의 요구를 고려해 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칼라힐스의 입장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요구를 수용하면 CDMA개발은 실패합니다. 신세기통신에 CDMA기술을 조건으로 사업권을 허가했는데 그 원칙을 정부가 지키지 않는다면 국가이익에 반하는 일입니다. 신세기통신에도 결코 이익이 되지 못합니다.”

한 시간여의 식사를 하면서 두 사람이 타결점을 모색했지만 현격한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헤어졌다. 경 장관은 재임 시 칼라힐스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만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정통부 CDMA상용화를 적극 밀어준 사람은 한이헌 대통령 경제수석(15대국회의원, 보증기금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교장)이었다. 그는 CDMA개발에 관해 정통부 입장을 지지했다.

한 수석의 증언.

“그 분야를 가장 잘 아는 곳이 해당 부처이고 그런 정책 결정은 장관의 책무입니다. 저는 국가를 위해 CDMA방식이 최선이라면 그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청와대 내부에서 CDMA기술에 관해 우려하는 시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한 실장은 한 수석에게도 “한 수석이 정통부 일을 챙겨야 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큰일납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근무했던 A씨의 기억.

“한 실장과 한 수석은 같은 청주 한씨로 항렬은 한 실장이 아저씨벌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실장은 한 수석을 다른 수석과 달리 예우했어요. 한 수석은 정권창출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런데다 공사가 분명하고 원리원칙에 투철했습니다.”

한 수석의 계속된 회고.

“저는 한 실장에게 `그 분야에 관해 정통부 장관보다 더 전문가가 어디 있겠느냐. 그들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 말했어요. 그리고 `CDMA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CDMA방식을 해야 IT산업이 발전한다는 것이 정통부 판단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CDMA와 관련해 정부내에서도 이견이 있었지만 `나를 설득시킬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수석은 칼리힐스와 면담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청와대 내 한 수석의 파워는 막강했다. 김영삼 정부시절 소통령이라고 불린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의 이권 개입과 관련한 이런 저런 설이 나돌았다. 특히 현철 씨와 친분이 있는 이웅렬 코오롱 그룹 부회장이 신세기통신 2대주주인 점을 이용해 칼라힐스와 호흡을 맞춰 TDMA방식 허용을 정부에 요구했다는 내용이다. 한 수석에게도 현철씨의 청탁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한 수석의 말.

“현철씨와 잘 압니다. 김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 제가 경제보좌역으로 경제정책을 총괄했으니 친분이 있지요. 하지만 현철씨가 한 번도 저한테 특정 사안과 관련해 청탁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정통부가 10월 20일 기술표준 단일화를 발표한 뒤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그 중심에 한국통신이 있었다. 한국통신은 10월 25일 `PCS의 접속방식으로 TDMA기술을 도입할 방침`이며 `스웨덴 에릭슨과 캐나다 노던텔레콤 등 2개사와 TDMA방식의 기술도입을 위한 양해각서를 교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통부는 이런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정통부에서 김창곤 기술심의관(정통부차관 역임, 현 LG유플러스 고문)이 사태 해결에 나섰다.

10월 말경. 김 기술심의관은 이준 사장(1군사령관 역임, 육군 대장 예편, 국방부 장관 역임)을 방문해 정부 입장을 전했다.

“한국통신의 복수표준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닙니다. 하지만 국가 기간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이 정부 정책에 반대해서는 안되는 일 아닙니까. 사장님이 대국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평생 개인보다는 국가를 우선하며 살았어요. 한국통신보다는 국가를 생각합니다. 사내 기술진들의 의견을 들어서 결정하겠습니다.”

김 기술심의관은 사장실을 나와 김노철 부사장(체신부 통신기술과장 역임)을 찾았다. 김 부사장이 체신부 통신기술과장 시절 김 기술심의관은 그 밑에서 사무관으로 일했다.

“정부 방침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이준 사장께도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사장께서 홍보실장을 불러 한국통신도 CDMA방식으로 한다고 발표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논란을 수습할수 없습니다.”

이런 막후노력으로 한국통신은 10월 31일 TDMA방식을 포기하고 CDMA방식의 PCS를 개발하기로 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CDMA개술 개발과 상용화 실무는 신용섭 연구개발과장(현 방송통신위원회 방통융합실장)이 담당했다. 그는 1993년 11월 기술기준과장으로 발령난 후 6년간 이 업무만 맡았다. 그는 CDMA와 관련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언론에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국회, 안기부(현 국가정보원)등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정통부를 겨냥한 언론의 화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이건수 동아전기 사장(현 동아일렉트론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다 귀국해 1986년 부도직전의 동아전기를 인수, 첨단기업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특유의 열정과 친화력으로 각계각층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신 과장의 회고.

“이건수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모든 언론들이 업계 주장을 일방적으로 기사화하니 논란만 치열해 졌습니다.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 사장은 두 말 않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며칠후 저녁. 이 사장은 국내 유력 일간 신문과 3대 방송사 정치부장을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이얏트 호텔 일식당으로 초대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KBS, MBC, SBS 등이 참석했다. 이 사장은 오정소 안기부 1차장(국가보훈처장 역임)도 초청했다.

이 사장의 증언.

“이들과는 평소 인연을 맺어 잘 알고 지냈습니다. 박항구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이동통신개발단장(현 소암시스템 회장)에게 부탁해 A4용지 3장에 CDMA에 관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이를 이들에게 나눠 주고 국가이익을 위해 CDMA개발은 꼭 성공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CDMA기술을 상용화하면 세계 최초다` 이런 기술을 정부가 개발하도록 언론이 도와줘야지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느냐고 설득했어요. 개별 기업보다는 국가를 위해 국산기술을 세계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지요. 부품과 단말기 등 연관산업도 발전할수 있잖아요.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가 기술개발을 해야 살길이 열린다며 언론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 이후 국내 언론들이 이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확 달라졌다. 정통부를 향한 언론의 화살을 이 사장이 나서 막아준 준 것이다.

이 사장은 CDMA상용화 이후 중국과 베트남의 제품 수출에도 민간외교관으로서 막후 역할을 했다. 그는 CDMA 중국진출을 위해 8년간 중국 최고위층 인사들과 교분을 쌓은 후 이를 바탕으로 CDMA를 중국에 수출했고 이어 베트남에도 수출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