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과학계를 이끄는 `스타 신진 과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올 들어 생명과학, 신소재공학, 물리학 등 다양한 첨단 과학 분야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우수 성과를 낸 젊은 과학자 4인이다.
전자신문과 한국연구재단(이사장 박찬모)이 박홍규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35), 백성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41), 윤태영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36), 이장식 국민대 신소재공학부 교수(37)등 4명을 어렵게 한 자리에 모았다. 전자신문 창간 28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R&D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해보기 위해서다.
각자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과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남이 해보지 않는 연구 영역을 개척해 젊은 나이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4명 모두 서울대 · 카이스트 등 최고 명문 대학에서 석 · 박사를 마친 뒤 미국에서 박사후연구원(포스닥)을 거쳐 국내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교육과학기술부와 연구재단이 추진하는 리더연구자 · 중견연구자 · 일반연구자지원사업 등에 선정돼 다른 연구자들보다 안정적 연구비가 보장됐지만 그만큼 어깨에 놓인 짐도 무겁다.
이공계 기피가 심화화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여전히 희망은 있고, 과학자는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는 소신이 뚜렷했다. 세 시간 남짓한 좌담회는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대한민국의 R&D 생태계에는 이미 긍정적 변화가 시작됐다. 이들의 패기를 이어받을 또다른 젊은 과학자를 길러내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부각됐다.
◇참석자: 박홍규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백성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윤태영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 이장식 국민대 신소재공학부 교수(가나다 순)
◇일시 및 장소: 2010년 9월 7일 오후 소공동 조선호텔
◇사회: 권상희 전자신문 경제과학팀장
◇사회(권상희 팀장)=최근에는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융합 기술을 따라가는 것이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 과학계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다. 기술의 융합으로 인해 이종 기술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글로벌화가 급진전됐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젊은 신진 과학자에게도 `융합환경`은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나라 연구개발 환경이 부딪친 내외부적인 도전에 대해 얘기해 보자
◇박홍규(고려대 교수)=기존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은 3차원 나노 레이저 발생장치를 개발한데 이어 좀 더 영역을 넓혀 나노태양전지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쫓아가다보면 언젠가 유행을 선도하는 자리에 서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트렌드를 따라가는 작업을 6개월 만 멈춰도 못 따라가는 시대가 됐다.
◇이장식(국민대 교수)=석 · 박사 시절만 해도 몇몇 분야의 학회 활동과 논문 연구만으로 타 영역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됐지만 지금은 내가 속한 분야 뿐 아니라 물리, 화학, 고분자 등 여러 영역이 섞여 연구가 진행된다. 이를 상호간 어떻게 잘 접목시키느냐가 큰 도전이다.
너무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 논문을 완성해 제출하기 하루 전 해외에서 유사한 논문이 발표되는 `억울하고 황당한` 경우도 있다. 나노 기술은 연구실들이 비슷한 아이디어를 갖고 실험을 진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조금이라도 늦으면 우수 저널에 글을 싣기 힘들다. 예전에 비해 정말 경쟁이 치열해졌다.
◇사회=R&D 예산의 양적인 지원 확대보다는 예산의 효율적 분배 등 질적인 효율성을 따져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높다. 네 교수님은 일반 연구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예산을 지원받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학문의 성격에 따라 창의사업을 하는 교수님들도 여전히 예산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많다. 그리고 예산의 효율적 배분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지 각자의 의견은.
◇백성희(서울대 교수)=최근 정부가 새로 시작하는 신진 연구자 지원 수혜대상이 상당히 많아져 기쁘다. 하지만 정부의 `일반연구자지원사업`이 끝난 연구자들은 다음 단계로 도약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연구자지원사업과 가장 윗 단계인 리더연구자지원사업을 이어주는 `중견연구자지원사업`의 비율을 확대해야 한다. 리더연구자지원사업을 맡을 경우 갈수록 연구단 규모가 커지고 연구작업도 심화되는데 예산은 매년 고정돼 있다 보니 후반부에 가면 예산에 쪼들린다. 단계적으로 연구비를 확대해야 한다.
◇이장식=신진연구지원부터 중견연구자 지원까지 쭉 거쳐오면서 일반연구자 사업은 신청 대비 선정률이 50%에 가까운데 중견연구 사업은 9%대까지 갑자기 줄었다. 연구 중간 단계에 뭔가 장치를 만들어 연구비를 지속적으로 조달 가능한 시스템이 조성돼야 할 것이다.
◇박홍규=우리 연구실은 반대로 초반에 연구비를 더 줬으면 한다. 나노 분야 연구의 성격상 초기 세팅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리더연구자 사업에 지정돼 처음 사기로 마음먹은 전자현미경이 4억원짜리여서 두 번에 나눠서 구매하기도 했다. 연구 특성에 맞춰 연구비 지원이 유연하게 지원됐으면 한다.
◇윤태영(카이스트 교수)=기초연구실사업 처럼 한 학과에서 실제로 연구를 밀접하게 같이 할 수 있는 연구자들이 뭉쳐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사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 특히 융 · 복합 연구의 경우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일괄적으로 돈을 나눠주고 보고서도 짜깁기 형태로 합치지 않도록 기초연구실 사업을 늘렸으면 한다.
◇대학의 연구가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 못지않게 기업의 지원과 정부출연연구소와 공동연구가 중요하다. 어떤 어려운 점이 있는지 말해달라.
◇박홍규=기업은 당장 먹고 살기 힘들고 언제 특정 부서가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유가 없고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때문에 대학에는 당장 기업이 투자하기 어려운 연구만 맡긴다. 출연연과의 협력도 쉽지 않았다. 기업이 당장 물건을 파는데 올인한다면 출연연구기관은 펀딩을 힘들어한다.
◇이장식=우리나라 대기업들도 이제 연구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 우리나라 대기업 연구소가 대부분 기업이 당장 추진하는 사업을 뒷받침하는데 반해 미국 IBM이 과학발전에 도움이 되는 논문을 다수 발표하는 것을 보면 부러울 따름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세계수준대학(WCU) 등 기술 융합에 따른 국제 공동 연구가 급진전된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연구 글로벌화에 대한 생각은.
◇백성희=정부가 WCU, 글로벌프론티어 등 세계화 사업을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급격히 진행하다보니 외국인과 한국인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느낌이 있다. 해외 연구 인력이 부족해 동남아 등지에서 인력을 수급하는 문제에도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
◇윤태영=글로벌 사업으로 한국 과학기술계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있는 계기를 맞았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도 많다. 해외 석학과의 인적 네트워크 구축은 돈을 주고 단기간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조심스럽게 진전시켜야 한다.
◇사회=SCI논문의 편수가 절대 기준이 된 우리나라의 연구 성과 평가 방식도 R&D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개선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결국 질적 평가를 잘 하려면 과학기술계의 기본적인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데
◇백성희=국제적 리더로서 학계를 이끄는 업적이나 해외 석학 동료들의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논문을 발표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국제 학회에서 기조연설과 좌장 역할을 얼마나 했느냐 등을 따지는 것이 질적 평가의 중요한 항목이 되어야 한다. 최근 신임 총장 선임 이후 연구 성과의 질적 평가를 대외적으로 공표한 서울대도 이같은 항목을 주요한 평가 요소로 고려한다.
◇이장식=질적 평가로 발전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한 기준이 확실히 정립돼야 한다. SCI논문 편수는 쉽게 도출되지만 석학의 기준이나 좋은 논문의 기준 등을 좀더 꼼꼼이 따져봐야 한다.
◇윤태영=WCU사업에 참여했던 한 미국인 교수가 `한국 과학계의 규모가 커지는 것이 질적 평가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했다. 갈수록 과학기술이 분야별로 전문화하는데 논문을 내는 당사자를 제외하면 심사를 질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심사위원은 얼마 남지 않아 평가에 어려움이 있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사회 문제로 고착됐다. 이공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백성희=화장품 광고에 나오듯 미래의 노벨상 꿈나무들에게 `나는 소중한 인재`라는 자부심을 어렸을 때부터 심어주는게 가장 중요하다. 요즘 학생들과 면담을 해보면 IMF 시대를 거친 학부모들이 자식들이 안정된 라이선스를 딴다는 생각 때문에 의대, 치대를 권한다. 너무 오랜 세월 부모에게 의존해온 학생들이 `쉬운 길로 가라`는 부모의 권유를 따르게 된다. 부모보다 먼저 어렸을 때부터 우수 학생들에게 `노벨상 꿈나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면 다른 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최근 기획한 미래과학핵심인재양성사업의 경우 노벨상 꿈나무 20명을 선정해 지원하는데 참 좋은 정책인 것 같다.
◇박홍규=과학자가 고된 직업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주변에서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출신고교인 과학고 동창회에 가보면 의사, 판검사가 대부분이고 카이스트 동창 중에서도 치과의사가 적지 않다. 나도 대학원에서 진로를 고민할 정도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공계를 졸업해도 안정적인 직업을 보장해주는 것이 관건이다.
◇이장식=이공계 졸업생 중 교수 선호율이 높은 것은 보수가 최고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수가 그나마 안정적인 직업이기 때문이다. 공대 졸업생의 대다수가 삼성전자 등 대기업 이외에는 갈 곳이 없어 할 일이 다양하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적지 않다.
◇윤태영=국가가 이공계 석박사 졸업생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생들 중 많은 이들이 치과의사가 된 것은 의대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이기 때문이다.
◇백성희=대학 내에서도 일자리에 대한 해답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대학의 사무원, 행정원들도 정년까지 근무를 한다. 우리나라도 학교와 관련된 직업을 안정화하고 포스닥들이 바깥에 나가 벤처를 창업하지 말고 학교 안에서 연구하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신진 과학자들은 아직까지 척박한 한국 과학기술계의 맨 앞에서 한 발 앞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만큼 어려움도 많을 것이다. 앞으로 포부는.
◇윤태영=1998년에 서울대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한 지 12년이 지났는데 한국 과학계가 그동안 눈부시게 발전했다. 특히 국내에서 박사를 딴 뒤 해외 연수 경험을 갖추고 임용된 교수들이 늘고 있어 한국 과학계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특히 올 들어 30대의 신진 과학자들이 세계적인 권위지 등에 잇따라 성과를 발표하는 사례가 이어지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다음 세대에는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고 한국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이곳에서 세계 최고 수준 학자들이 배출되도록 일조하겠다.
◇백성희=내 연구 분야에서 독창적인 고유 영역을 만들어 국제적인 대가가 되고 한국을 그 분야의 메카로 만드는 것이 내 꿈이다. 후학들이 우리보다 훨씬 좋은 연구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인재를 양성하고 롤모델을 만드는 것이 임무라고 본다.
◇박홍규=연구 중인 나노 레이저 분야가 기초와 응용학문을 융합한 연구인만큼 기초와 응용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 다양한 트렌드를 부지런히 따라가고 유행을 선도할 수 있는 리더가 되겠다.
◇이장식=신소재 공학 분야에서 꾸준히 노력해 이 분야를 리딩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서고 싶다. 내 연구결과와 지적재산권이 좋은 제품을 만드는 밑거름이 돼 산업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신진과학자들은 세 시간여에 걸친 좌담회를 마치면서 이들이 거쳐 온 연구 경력과 성과, 앞으로의 행보가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줄 수 있기를 기원했다. 이들의 바람이 결코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닌 듯하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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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