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 설립된 대만 미디어텍과 지난 1999년 설립된 엠텍비젼의 초기 성장과정은 비슷했다.
미디어텍은 삼성전자와 LG전자에 CD롬 드라이브용 디지털신호처리장치(DSP)를 납품하면서 성장을 시작했고 엠텍비젼 역시 국내 대기업에 휴대폰용 카메라 이미지 처리 프로세서를 공급하면서 두각을 나타났다.
10년이 지난 지금, 미디어텍은 지난해 4조23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엠텍비젼은 1346억원 매출에 그쳤다.
대만과 국내 팹리스 간 격차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팹리스 기업들이 10억달러 매출을 기록한 반면에 대만 팹리스 기업은 총 100억달러의 매출을 올려 매출 격차가 10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만 팹리스 기업은 지난해 1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 기업 수가 23개에 이르는 반면에 국내 팹리스는 2개에 불과하다.
전체 전자제품 시장이 더 큰데도 매출에서 뒤떨어진 것은 순수 파운드리 부재, 인력 부족, 기업 인수합병(M&A) 부진 때문으로 풀이된다.
세계 1 · 2위 파운드리 기업인 TSMC · UMC가 포진한 대만은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UMC는 미디어텍의 지분 1.4%를 보유하는 등 파운드리와 팹리스 간 지분 섞기가 보편화돼 있다. 밍토 위 미디어텍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세계적인 파운드리가 있다는 건 대만 팹리스 업체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배경”이라고 말했다.
한국 파운드리 업계가 지난해 11억달러 매출을 올리는 동안 대만은 순수하게 반도체를 찍어내는 것으로 125억달러를 벌었다. 한국의 파운드리 회사가 모두 종합반도체(IDM) 기업이라는 점도 차이다. TSMC와 UMC는 자사 개발 제품이 없어서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가 적지만 국내 삼성전자 · 동부하이텍 · 매그나칩 · 하이닉스는 모두 자사 제품을 설계한다.
한 팹리스 업체 사장은 “사업부가 분리돼 있어서 괜찮다고 하지만 설계부서와 파운드리부서가 내용을 공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반도체 인력 차이도 양국 간 격차를 벌리는 한 요인이다. 서강대 아날로그IP설계기술연구센터 개소식에서 이승훈 공과대학장은 “대만에서는 아날로그 반도체 설계 인력만 매년 석사 1200명, 박사 300여명이 배출된다”며 “국내에 아날로그 반도체 설계 인력은 전체를 통틀어 500여명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교수 수도 대만이 340여명, 국내는 20여명이다. 산업의 성장을 뒷받침할 텃밭 자체가 너무 작으니 소출도 적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팹리스에 종사하는 직원들도 대기업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텔레칩스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올해 상반기까지만 30여명의 설계 인력이 대기업으로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대만 기업들의 적극적인 M&A 전략도 대만 팹리스 산업을 살찌웠다. 미디어텍은 지난 2007년 아날로그디바이스(ADI)의 모뎀 사업부를 인수해 회사의 성장동력으로 삼았다.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베이스밴드를 개발한 국내 업체 이오넥스를 인수한 것도 미디어텍이다. 미디어텍은 이를 바탕으로 광드라이브 DSP에서 휴대폰용 모뎀칩에 이르기까지 제품 라인업을 확대할 수 있었다. 대만 실리콘모션은 국내 모바일TV칩 업체 에프씨아이(FCI)를 인수, 사업을 다각화했다. M&A를 통해 대만 업체들이 활로를 모색하는 동안 국내 팹리스업계의 M&A는 사실상 전무했다.
이성민 엠텍비젼 사장은 “국내에서는 기술에 대한 가치 평가가 박하다는 게 큰 이유”라고 말했다. 손종형 아이서플라이 한국 지사장은 “대만은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동반 성장해면서 상승효과를 낸 반면에 우리나라는 그런 연결고리가 없었다”며 “팹리스 매출 감소, 파운드리 투자 축소 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고리를 어느 한쪽이라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형준 · 오은지 기자 hjyoo@etnews.co.kr
초기 성장 비슷했지만 매출 10년새 10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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