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영국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는 기계를 이용해 섬유를 짜는 것에 반대하는 가내수공업자들의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가정에서 손으로 실을 뽑아 옷감을 만들던 이들은 자동화된 방적 · 방직기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며 `기계파괴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 노동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동방직기가 4만5000인치의 옷감을 만드는 데는 12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은 단 4명만이 필요합니다. 방직기는 명백한 `유해수단`입니다.”
가내수공업자들에게 섬유산업의 혁명을 가져온 방적 · 방직기는 유해수단으로 인식됐다. `신기술 혐오`로 요약되는 `러다이트(Luddite)` 운동의 시작이었다. 러다이트 운동은 이후 프랑스 · 벨기에 등으로 번지며 20여년간 계속됐다.
◇장면2=200년 후 한국. A씨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신세계 이마트를 찾았다. 지난 2005년 부분 도입된 뒤 최근 보급이 늘기 시작한 `무인 계산대`를 사용해보기 위해서다. 이곳의 계산 코너에는 총 4대의 무인 계산대가 놓여 있다. 구입한 커피와 우유에 찍힌 바코드를 단말기에 갖다 대자 합계가 자동 계산됐다.
“4380원입니다.”
`완료` 버튼을 눌렀다.
“할인쿠폰 및 적립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상냥한` 기계음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신용카드를 단말기에 읽히자 절차가 마무리됐다. 할인마트에 들어가서 계산하고 나오는 데까지 어떤 직원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할인마트들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무인 계산대 설치 대수를 점차 늘리는 중이다. 유인 계산 코너 직원에게 오늘날의 무인 계산대는 1760년대 자동 방적 · 방직기와 다름없다.
◇IT, `신(新, Neo) 러다이티즘` 몰고 오나=IT가 우리 생활 곳곳에 파고들면서 점점 더 편리해지고 있지만 동시에 기존에 존재하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일부는 IT를 일자리를 앗아가는 `나쁜 산업`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IT 혁신이 거듭되는 현재의 상황이 200년 전 러다이트 운동이 극심했던 당시와 유사하다는 이유에서다.
예컨대 전자태그(RFID) 기술을 이용한 고속도로 `하이패스`가 일반화되면서 요금소 제일 안쪽 차선 두세 곳은 무인 계산대로 바뀐 지 오래다. 불과 수년 전까지 그곳에는 직접 요금을 계산하고 거스름돈을 내어주던 직원이 상주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008년 아놀드 슈워제네거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접견자리에서 “IT시대에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소득격차가 벌어졌다”고 설명한 바 있다. IT산업이 일자리 창출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표현한 셈이다.
IT산업 자체의 고용창출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6일 “IT 산업은 더 이상 고용창출 동력이 아니다”며 “IT산업 성장은 단지 IT기업의 이익만 늘려줄 뿐”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그간 IT산업은 미국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유망한 부문으로 최근의 경기침체도 상대적으로 별 타격 없이 벗어났다”면서도 “IT업계의 고용 창출 능력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이 같은 IT업계의 `고용 없는 성장` 현상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이 지난 7월 발간한 `IT 중심 성장과 정책과제` 보고서를 보면 반도체 · 통신기기 등 정보기술(IT) 제조업 중심의 성장으로 일자리 창출 효과가 떨어지고 소득 · 성장의 괴리가 심화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7년 기준 IT제조업의 취업유발계수는 5.7명으로 제조업 평균(9.2명)을 크게 밑돌았다. 특히 건설업(16.8명)과 서비스업(18.1명)을 포함한 전 산업 평균(13.9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취업유발계수는 특정산업 제품에 대한 최종수요가 10억원이 발생할 경우 해당산업을 포함한 전 산업에서 직간접적으로 유발되는 취업자 수다. 선박이나 자동차는 10억원어치가 팔리면 10명이 넘는 일자리가 생기지만 IT제조업은 5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IT제조업이 성장 주력업종으로 부상하면서 성장-소득-고용 간 선순환 관계가 약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IT제조업과 여타 산업의 융합으로 신산업 · 신시장 창출 등 차세대 성장주력산업 발굴을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IT, 융합으로 네오 러다이티즘 넘어라=그렇다면 앞으로 고용창출을 위해 IT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경제 구조를 이동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IT가 기존 전통산업과의 융합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특성 덕분에 그동안 없었던 제3의 일자리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과거 IT 관련 기기 ·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20% 정도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50%까지 높아졌다. 자동차 생산액 대비 부품산업은 취약했던 우리나라가 최근 후방산업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이유다.
한국의 주력산업 중 하나인 섬유 부문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따르면 응용IT와 접목되는 스마트 의류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2014년 70억달러 규모의 산업이 새로 생겨날 전망이다. 인건비 경쟁으로 전통 섬유산업은 중국 등 신흥국에 넘겨줬지만 IT 융합 분야는 우리나라가 절대 우위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부품 · 소재 등 후방산업 육성으로 네오 러다이티즘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현재 우리나라 IT 제조업의 고용 창출 규모가 적은 것은 완제품에 들어가는 상당수의 부품 · 소재를 해외로부터 수입해오기 때문이다. 인력 수요가 적고, 공정 자동화율이 높은 완제품 사업에 산업이 집중된 탓에 인력 수요가 적다.
소프트웨어 등 IT서비스업 육성도 과제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IT서비스업 비중이 15% 미만으로 노르웨이 · 체코 · 핀란드 등과 함께 하위 그룹에 속한다. 반면에 영국 · 스위스 · 미국 등 선두권 국가들은 IT 서비스업 비중이 20%를 상회한다.
안철수 KAIST 석좌교수는 “고등교육 인력들이 많은 우리나라 인력구조상 IT산업이 적합하다”며 “지금까지의 IT산업은 다른 나라에서 해 온 것들을 모방하고 따라잡으면서 왔지만 앞으로는 보다 창조적이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러다이트 운동&네오 러다이티즘=1800년대 초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지역에서 번졌던 기계파괴운동에서 비롯됐다. 방직기 등 고효율의 신기술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주장해 `신기술 혐오`로 집약된다. 정체불명의 지도자 `N 러드`라는 인물이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에 러다이트 운동으로 불려진다. `네오 러다이티즘`은 최근 IT 혁신에 따라 일자리가 줄어드는 데 반발하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안석현기자 ahngija@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