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전자 유통 매장을 찾으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비슷비슷한 제품이 브랜드만 달리해 매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늘 우리가 접하는 휴대폰만 보더라도 한 달에 수십개 `신상`이 쏟아져 나온다.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 난다면 매장에는 제품이 넘쳐 난다. 바야흐로 전자 제품의 홍수 시대다.
여기에 기술이 보편화하면서 신제품 교체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 휴대폰 · PC와 같은 IT제품은 물론이고 비교적 내구연한이 긴 TV · 냉장고 · 세탁기는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신제품 주기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에 달했다. 지금은 불과 한 달 간격으로 새로운 모델이 소비자를 유혹한다.
소비자는 혼란스럽다. 제품 가격은 인터넷에 가면 그나마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품질에 관해서는 대안이 없다. 품질 비교를 위한 정확한 기준이나 원칙도 없을 뿐더러 품질 비교 자료조차도 극히 제한적이다. 소비자는 결국 대충 브랜드를 보거나 광고를 믿고 살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업체별로 성능과 가격 등 여러 요인의 우열을 비교 분석해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평가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전문 잡지 등을 통해 리뷰 기사가 게재되지만 구독자가 1만명 안팎에 그친다. 그나마 국내에서 제품 품질 비교를 진행하는 곳은 두 군데다. 1983년 출범한 소비자시민모임(소시모)과 공정거래위원회 산하 소비자원이다. 소시모는 2004년부터 매월 5000부의 `소비자 리포트`를 만들고 소비자원은 1만2000부가량의 잡지 `소비자 시대`을 발행하고 있다. 합쳐봐야 총 1만7000부에서 알 수 있듯 아직 공신력을 얻기는 미약하다. `에너지 위너상` 등도 있지만 이는 주로 에너지 효율 평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에 상업 광고 집행, 리뷰 제품의 기업 제공 등 상업지로서 제약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라고 부르기는 한계가 많다. 온라인에서 동호회 · 카페 중심으로 일부 제품에 대해 테스트를 진행 중이지만 검사 시설 자체가 빈약할 뿐더러 비공식단체여서 평가의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평가 결과에 대해 적잖은 논란을 빚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해외 선진국은 다르다. 미국은 1936년 `컨슈머리포트(Consumer Reports)`가 나와 벌써 70년 넘게 운영되고 있다. 실생활에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며 산업계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고 소비자 권익 보호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최근에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애플 스티브 잡스도 컨슈머리포트로 곤욕을 치렀다. 스마트폰 `아이폰4` 수신을 둘러싼 논란 때문이었다. 지난 7월 아이폰4를 특정 방식으로 쥐면 수신 강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문제를 인터넷 매체와 블로그에서 줄곧 제기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답변은 간단했다. “그렇게 쥐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였다. 이후 애플 팬과 비판적인 블로거와 미디어는 지루한 논쟁을 계속했다. 종지부를 찍은 게 다름 아닌 컨슈머리포트였다. 자체 테스트에서 수신 결함이 하드웨어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며 `아이폰4를 추천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자 꿈쩍하지 않던 스티브 잡스도 부랴부랴 긴급 기자 회견을 열고 “놀랐고 당황스럽다”며 대책을 제시했다.
이뿐 아니다. 컨슈머리포트의 위력은 도요타 대규모 리콜 사태에서도 확인됐다. 지난 4월 컨슈머리포트는 도요타의 신형 SUV인 렉서스 `GX460`이 고속 주행할 때 전복 위험이 있다며 구입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결국 도요타는 미국 판매를 중단하고 리콜을 실시했다.
그렇다고 컨슈머리포트가 기업에 늘 `저승사자`는 아니다. 공정한 평가 덕분에 소모적인 시장 경쟁을 줄이면서 비즈니스에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다. 2006년 삼성전자가 LCD TV `보르도`를 출시한 이 후 컨슈머리포트는 찬사를 보내며 인치별 1위로 다수 제품을 올렸다. 이 덕분에 삼성은 보르도를 시작으로 세계 1위로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 후 2008년 크리스털로즈, 2009년 LED TV, 2010년 3DTV로 이어지면서 세계 TV시장 1위 자리를 확실히 굳혔다.
최근에도 컨슈머리포트가 8월에 자동차 특집호를 발행하면서 현대자동차 신형 쏘나타를 가장 우수한 패밀리 세단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2011년형 280개 모델 차량을 조사 시험한 결과였다. 이 결과 이미 미국 승용차 부문에서 8위에 오르는 등 상승세에 올라탄 소나타는 전년 동월 대비 30% 이상 판매량이 치솟았다.
산업계에서는 “권위 있는 평가 기관과 리포트가 있다면 소비자는 제품 분별력을 높여 현명한 선택을 돕고 기업도 경쟁력 있는 제품 개발을 촉진해 소비자, 기업, 국가 모두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