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20>

부총리 서면약속 “한국통신 매각대금 30%는 진흥기금으로 출연한다”



정보화촉진기본법 제정



1995년 1월.

영하의 강추위가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했지만 미래부서로 출범한 정보통신부 분위기는 춘삼월(春三月)이었다. 정보통신부 출범은 김영삼 정부가 21세기 정보화를 국가핵심 전략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단행한 히든카드였다. 여러 부처에 분산돼 있던 정보산업과 뉴미디어관련 정책기능은 정보통신부로 일원화했다. 정보통신산업의 종합적인 육성체계를 마련하고 정책의 일관성을 확립한 것이다.

1월 6일 오전 9시 청와대 춘추관.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2주년을 맞아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세계화를 첫번째 국정목표로 제시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정보화시대라는 새로운 조류가 지구를 하나로 만들면서 세상을 바꾸고 있다”면서 ”세계화는 우리를 21세기 일류국가건설로 이끄는 지금길“이라고 강조했다.

정보통신부는 9일 대통령에 대한 새해 업무 보고에 이어 1월 11일 1995년도에 추진할 주요업무계획을 발표했다. 크게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과 △정보통신산업 육성 △신규 정보매체활성화 △통신산업 경쟁력강화 △해외진출 지원 △통신이용 편익 증진 등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정보통신부는 국가정보화를 주도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경상현 장관은 새해 언론과의 회견에서 “정보화촉진법을 조기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정보통신부는 지난해 말 정부조직개편으로 보류한 정보화촉진기본법 제정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조직개편에 따른 업무 이관 등으로 법안의 부분 손질이 불가피했다. 정보기기와 소프트웨어, 유선 방송 등의 업무가 정통부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정보통신부는 6월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경 장관의 회고.

“이 법안 작업에는 장관 이하 모든 사람이 총동원됐습니다. 이 법안은 우리나라 정보통신과 국가정보화의 핵심인 법적 제도적 근거가 되는 법입니다. 정보통신부로서는 제정이 시급한 법안이었습니다.”

이 법안 작업의 업무라인은 정홍식 정보통신정책 실장(정통부 차관, LG데이콤 부회장 역임)과 강상훈 정책심의관(청와대정보통신비서관,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역임, 현 앤씨소프트 감사)과 류필계 과장(정통부 정책홍보관리본부장 역임, 현 LG유플러스 부사장), 강성주 사무관(현 행정안전부 정보기반정책관) 등이었다. 류 과장과 강 사무관은 1993년부터 법안 업무를 계속 맡았다.

정 실장은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실에서 10년간 일하면서 각종 IT정책의 견인 역활을 한 관계로 정책입안의 메커니즘을 휜히 꿰뚫고 있었다.

당시 정책실에 근무했던 A과장의 말.

“그 당시는 정해진 퇴근시간이란 게 없었습니다. 실국장들도 11시가 넘어 퇴근을 했습니다. 그때는 주말도 없이 모두 그렇게 일했습니다. 정 실장은 원칙과 방향을 정해 주고 일을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법안에는 확산일로에 있던 인터넷을 지원하기 위한 내용을 넣었고 당시 별관심이 없던 개인정보 보호 등 인터넷의 부정적 역할을 막기 위한 대책도 포함시켰다.

정보통신부는 업무를 세분해 각 과별로 책임을 맡겼다. 부처별 담당제를 정해 관련 부처의 언론발표 내용부터 장관동정 등을 소상히 파악하고 필요할 경우 언론에 대응 자료도 발표했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재정경제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법제처 등은 류필계 정보정책과장이 책임을 맡았다. 그가 실무 과장인 만큼 가장 무거운 짐을 졌다. 통상산업부(현 지식경제부)는 상공부 출신인 김원식 기술기획과장(정통부 미래정보전략본부장, TTA회장 역임, 현 법무법인 세종 고문)이 담당했다. 문화체육부와 총무처 등은 이성옥 정책총괄과장(정통부 정보화기획실장,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역임, 현 한국정보산업연합회 부회장), 과학기술처와 노동부는 신용섭 연구개발과장(현 방통위 방통융합실장), 공보처는 박정렬 기술기준과장(현 특허청 전기전자심사국장) 등이 각각 맡았다.

당시 협의 대상자 중 나중에 정통부로 넘어 온 사람이 국무총리실 변재일 산업심의관이다. 그는 정통부 담당 국장이었다가 1998년 6월 정보통신부 정보화기획실장으로 발령받은 후 기획관리실장. 차관을 거쳐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5월 차출케이스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충북 청원에서 출마해 17대 국회에 진출했다. 2선인 그는 현재 국회교육과학기술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통부의 커진 파워를 실감하게 하는 숨겨진 일화 한토막.

국가 경제를 손안에 놓고 주무르는 경제부총리가 정통부 장관과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극히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법안 제정을 둘러싼 묵은 감정이 쌓인 탓인가. 하지만 정통부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무렵, 정보화촉진기금을 놓고 정통부와 재경원은 막판까지 첨예한 갈등 관계를 보였다. 핵심은 한국통신(현 KT) 주식매각대금, 정보통신부는 매각대금을 정보화촉진기금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반해 재정경제원은 재정투융자특별회계법에 의해 재정투융자특별회계의 세입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팽팽히 맞섰다. 정보통신부는 이에 대해 KT 매각대금의 30%를 정보화기금으로 출연한다는 내용으로 부총리와 양해합의서를 맺기로 했다.

법안 초안의 실무를 담당했던 강 사무관의 증언.

“윗선에서 지시를 내렸습니다. 우리는 정 실장을 통해 지시를 받았습니다. 양해각서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재경원 예산실장이 펄쩍 뛰었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총리가 양해각서를 맺는 일이 거의 없잖습니까. 그런데 한국통신 주식매각 대금이 워낙 많다보니 결국은 부총리가 양해각서를 맺는데 동의했습니다. 매각 대금의 30%는 기금으로 내놓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홍재형 부총리(현 민주당 국회부의장)는 이영탁 재경원예산실장(국무총리 행조실장, 교육부 차관, 한국거래소이사장 역임, 현 세계미래포럼 이사장)의 건의를 받아 양해각서를 맺었다는 것이다. 이 예산실장도 “별 희안한 양해각서를 다 체결한다”고 했다는 후문이다.

이런 조치는 예산이란 국가경영의 우선순위에 따라 증감하지만 기금은 지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정보통신부는 법적으로 매년 촉진기금을 조성할 수 있었다.

통상산업부를 담당했던 김원식 과장의 기억.

“통상산업부와는 표준화를 협의했습니다. 공진청 업무여서 공진청과 협의를 했습니다. 두 가지 사항에 합의했습니다. 하나는 기본법안에 부가 조항으로 공업표준화 법에 따른다는 조항을 넣기로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대신 정보통신분야 KS관리 업무를 공진청이 정보통신부로 넘겨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조건으로 표준화에 합의했는데 나중에 공진청이 업무이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부처 협의와 법안의결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정보통신부는 5월 13일 정보화촉진기본법안을 입법 예고했다. 그리고 6월 28일 차관회의와 6월 30일 경제장관회의을 거쳐 7월 7일 오전 열린 국무회의에서 법안을 의결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아무리 매서워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대세는 이미 정보통신부로 기울어 있었다.

마지막 관문을 국회통과였다. 정통부는 법안을 7월 5일 개회한 제176회 임시국회에 제출했다. 7월 14일 국회통신과학위원회(위원장 최낙도 의원)를 통과한 법안은 임시국회 마지막날인 7월 15일 오전 9시 반에 국회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이날 오전 10시 반에 본회의에 상정됐다. 이 법안은 오후 3시 20번째 안건으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입법을 둘러싼 부처 간 긴 주도권 여정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 법이 제정되면서 정보통신부 장관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정보통신부 장관이 정보화촉진기본계획을 실질적으로 수립할 수 있어 중앙부처 및 지방행정기관 등에 관할권 행사가 가능해 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보화촉진이나 사업추진시 다른 부처가 지장을 줄 우려가 있을 경우 사전에 정보통신부 장관과 협의를 거치도록 했다.

이 법은 6장 36조 및 부칙으로 구성됐다.

이 법은 국가 정보화 촉진과 정보통신산업의 기반조성, 정보통신기반의 고도화를 위한 법적 근거가 됐다. 이를 위해 정부 내에 흩어졌던 정보화 관련 기능을 정보통신부로 통합했다. 정보화촉진 및 통신산업 진흥 정책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할 기구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보화추진위원회를 설치 운영키로 했다. 또 중앙행정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주요 정책을 수립, 집행할 때는 정보화 촉진과 정보통신 사업의 진흥 등 정보화 관련 사항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을 의무화했다.

이 법은 8월 4일 공포했고 1996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이에 앞서 정보통신부는 후속조치로 시행령을 10월 입법예고 했으며 12월에 시행령과 규칙을 마련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2001년 2월 펴낸 회고록에서 이법 제정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했다.

“나는 정보강국을 위해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했고 이어 1995년 8월 기본법을 제정했다. 정보화 입국을 위한 법적 뒷받침을 완비한 것이다. 이 법에 근거해 1996년 4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보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종합적인 정보화시책을 추진토록 했다. 위원은 각 부처 장관과 국회사무총장, 법원 행정처장 등 25명 이내로 구성키로 했다.”

정홍식 실장의 회고록 증언.

“이 법은 정보통신부 도약의 발판이었습니다. 또 개인정보보호 등 정보화의 부정적 측면에 관한 대책을 최초로 반영한 법입니다. 이 법 제정은 정보화관련 정책을 범정부적으로 일관성있게 추진할 수 있고 한국IT산업발전의 핵심적인 법적 · 제도적 근거가 됐다고 평가합니다(한국IT정책 20년에서).”

김 대통령의 평가처럼 이 법은 IT코리아 건설을 위한 원동력이 됐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