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에 빠진 `폴리시 믹스`

글로벌 환율전쟁에 따른 경제정책 운용 부담이 가시화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환율전쟁`을 의식해 기준금리를 동결했지만 원화값 절상 추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경제 버팀목인 수출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이런 가운데 물가 상승세가 심해지고 일부에서는 자산가격 오름세 조짐도 보인다.

경제 기초여건(펀더멘털) 악화와 경제 버블(거품)이 염려되는 형국이다. 그만큼 정부의 거시경제 운용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최근 상황은 정부가 최적의 `정책조합(폴리시 믹스)`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거시경제 운용의 기본은 재정과 금리, 외환 등 주요 정책 변수를 적절히 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정부의 선택 여지가 줄어들고 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1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물가 불안과 환율 변동성 우려를 동시에 제기한 것도 최적의 정책조합을 찾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은의 기준금리 동결 조치는 물가를 희생하는 대신 금리 인상에 따른 외환 유입을 막아 원화값 상승을 억제한 것이지만 한은으로서는 이 둘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난처한 분위기는 경제정책 주무부서인 기획재정부에서도 감지된다.

재정부 관계자는 "재정정책은 정책조합에서 중장기적 해법 성격이 강하고 대외환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환율정책도 한계가 있다"면서 "한은의 금리정책 정도가 수단으로 남지만 요즘같이 시장의 힘이 강한 때에 정교한 경제정책을 구사하기란 어렵다"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확장적 재정 정책과 금리 인하를 통한 위기 극복이라는 목표가 확연했기 때문에 정책조합도 뚜렷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정책 목표가 다변화된 데다 대외 불확실성이 가중되면서 정책조합이 어려워졌다.

재정 투입을 통한 지속적인 경기 부양책은 재정건전성 확보라는 문제에 봉착했고 환율전쟁으로 외환시장 개입에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수출경쟁력을 감안하면 무작정 금리를 올리기에도 부담이 커졌다.

특히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의장국이라는 한국의 입지가 정책조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 정부가 거시경제의 주요 변수로 보고 있는 환율을 과거처럼 관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미국이 암묵적인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일본도 외환시장 개입 운운하며 우리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등 압박을 가하고 있다.

위안화 절상을 둘러싼 미ㆍ중 간 대립과 그에 따른 환율ㆍ무역전쟁 확산 움직임은 우리 경제 정책의 외생변수로서 우리의 주관적 개입이 불가능하다.

일각에서는 다음달 G20 정상회의가 끝날 때까지 우리 정부의 정책조합에 어려움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미국 중간선거와 G20 정상회의가 끝나는 다음달 중순이 돼야 경제정책 방향이 보다 선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외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한국의 대응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일단은 기존 정책조합을 유지하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지적한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경제연구부장은 "한국 정부가 현재 적극적인 정책 변화를 줄 여지도 없는 상황이라면 현재 안정 기조를 유지하면서 향후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각에서는 위기 극복에 동원됐던 확장적 재정정책이 재정건전성 기조 속에 사실상 폐기되면서 금리정책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외환경 변화를 주시한 채 금리정책을 활용해 경제를 미세 조정하는 것이 현재 최적의 정책조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재정-환율정책`은 현행 환율전쟁 이전의 기조를 유지한 채 상황에 따라 금리에 변동을 주는 대응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금리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정책조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외환시장에 충격이 덜 가도록 금리 동결을 주장하는 측과 물가 불안을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을 강조하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번 한국은행의 금리 동결로 갈 곳을 잃은 650조원의 단기 부동자금이 증시와 부동산으로 쏠려 자산 버블을 낳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금리 인상으로 물가 상승은 다소 완화할 수 있겠지만 가계부채 부담이 커지고 기업 대출이자상환 부담으로 경기 부양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금리 인상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한은의 운신의 폭은 작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한은의 이번 금리 동결에 대해 인정하는 쪽도 있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큰 최근 상황을 감안하면 선제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통화정책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금리 동결에 따른 자산 버블 우려에 대해서는 대체로 정상적인 금리 인상의 필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차제에 우리 경제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동안 정부 정책은 환율, 금리를 감안해 큰 그림을 그려왔다. 그러나 대외 변수가 불안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정책 방향은 내부적인 상황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단기적으로 환율을 안정시키겠다는 접근보다는 환율 변동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산업 경쟁력 강화에 치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리 변화에도 경제 주체들이 큰 부담을 지지 않는 맞춤형 미시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환율, 금리를 포함한 거시적인 가격 정책은 점점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다"며 "이제는 정책적인 방향을 경제 주체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맞춤형 전략으로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용어>

폴리시 믹스(Policy Mix) : 경제의 성장과 안정을 동시 실현하기 위해 재정ㆍ금융ㆍ외환 등 각종 정책을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독립적인 역할을 절충함으로써 상충되는 정책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취지다.

[매일경제 정혁훈 기자/김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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