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못 했다. 접대의 기술도 몰랐다. 게다가 영업 마인드도 부족했다. 주변 모든 이들이 만류했다. `넌 사업 자질이 없다`면서, `가망 없는 일에는 도전하지 말라`고. 1995년, 이런 소리를 들었던 청년이 있었다. 숫기없던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 꼭 무언가를 보여주리라`라는 다짐을 가슴 속에 새겼다. 16년이 지난 지금, 그는 PDA 하나로 530억 매출을 올리는 기업의 대표가 됐다. 국내 산업용 PDA 시장 점유율 60%를 차지하고 있는 블루버드소프트의 이장원 사장(42)이다.
이 사장은 중학생 때부터 사업가를 꿈꿨다. 이유는 소박했다. 역사책에 기록될 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1980년대 초,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정치가나 군인 정도는 돼야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책에 이름을 올리려면 이 직업을 바라는 게 맞을 터. 하지만, 이 사장은 달랐다. 세상은 분명히 달라진다고 믿었다.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제품을 내놓는 사업가가 성공하는 시대가 온다고 확신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말보다 실천이, 임기응변보다 계획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직하게 자신이 꿈꾸는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그의 인생 밑그림은 중학생 때 완성된 셈이다. 이후 행보는 이미 완성한 밑그림에 알록달록 색칠하는 일이었다.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사업에 필요한 자질을 갈고 닦으려면 경영학을 전공해야 한다고 믿은 그는 1987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막상 경영학 수업을 듣다 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단순히 이론만 익혀서는 창의적인 사업을 발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갈증은 뜻밖에 다른 곳에서 풀렸다. 각종 회로기판과 전산 언어는 그를 흥미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바로 컴퓨터공학과 전산학 수업을 찾아서 들었다. 석사 과정은 아예 산업공학과를 선택했다.
궁금증도 바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가 찾던 식당의 손익분기점까지 따졌다. 이를 토대로 학부 시절 그가 만든 사업계획서만 200여개. 이 사장에겐 `이 정도면 가능하다`라는 자신감이 슬슬 차올랐다.
1995년 이 사장은 동료와 의기투합해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1억원의 종잣돈도 모았다. 블루버드소프트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인 게 바로 이때. 경영은 이 사장의 동료가 맡았다. 대신 그는 삼성데이터시스템(현 삼성SDS)에 근무하며 대기업의 시스템과 산업 동향을 익혔다. 밤에는 블루버드 사무실을 찾아가 소프트웨어 개발에 몰두했다.
자본금을 다 까먹을 즈음, 야심 차게 신제품을 내놓았다. 바로 우리나라 1세대 통신 소프트웨어로 불리는 `블루버드메신저`다. 영상통화와 음성통화를 모두 지원하는 이 소프트웨어는 `소프트메신저`와 자웅을 겨루며 국내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다.
“당시 삼성 · LG전자 등 각 기업에서 채택한 구내 메신저의 원본이 바로 블루버드메신저입니다. 그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블루버드메신저는 성공했지만, 또 다른 고민이 그를 압박했다. 적자는 면했지만, 발전 속도가 더뎠다. 무엇보다 기업의 영속성을 자신할 수 없었다. 이 사장의 성에 차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또한, 삼성SDS를 그만두고 블루버드소프트의 경영 전반을 맡게 되면서 함께하는 직원들의 미래도 책임져야 했다.
`이 속도로 가다가는 내가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후 신사업 발굴을 향한 인고의 시간이 이어졌다. 신사업이 갖춰야 할 요건은 세 가지. 기업의 영속성을 지닐 것, `빅 자이언트(대기업)`에 영역을 뺏기지 말아야 할 것, 트렌드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
고민 끝에 산업용 PDA를 최종 후보로 낙점했다. 당시 산업용 PDA 시장은 심볼 · 후지쯔 · 캐논 등이 장악하고 있었다. 기술 격차도 컸고, 시장 정보도 많지 않았다. 더구나 국내 시장은 작고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막연한 자신감이 자석처럼 그를 PDA로 이끌었다.
막상 결단을 내렸지만 따라오는 건 고난의 시간이었다. 1998년, 처음으로 공급한 PDA가 고작 100여대. 5~6년간 PDA 분야에서는 매출이 거의 없었다. 1998년 이후 연구개발(R&D) 인력 채용도 대부분 PDA 분야 종사자였다. 무엇보다 규모가 몇 배 이상 성장한 회사를 유지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소프트웨어 분야 정리 과정도 쉽지 않았다. 이미 규모가 커진 터라, 국외 법인만 미국 · 중국 · 일본 세 곳에 두고 있었다. 관계를 맺고 있는 바이어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그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스미마센`입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일본 출장만 열 번 넘게 다녔습니다.”
언제 또 마주할지 모르는 게 외국 바이어였다. 돌아서면 남남이라지만 한번 맺은 인연을 허무하게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들에게 신뢰를 남기는 게 필요했다. 이 사장은 안녕을 고하는 자리에서 이 말을 덧붙였다.
“우리, 다음에 꼭 돌아올 겁니다. 기대하십시오.”
2002년 이 사장에게도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풀무원을 시작으로 현대 · 롯데백화점에 납품이 이뤄졌다. 몇 년간 샘플 수준의 극소량만 납품하던 것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물론 계약은 쉽지 않았다. 이름도 낯선 국내 업체에 다량 주문을 할 리 만무했다.
“풀무원 회장님을 만나려 몇 날 며칠을 집 앞에서 기다리곤 했습니다. 연세대를 방문한다는 얘길 듣고 그곳까지 찾아가기도 했고요.”
우려를 믿음으로 바꾼 건 이 사장의 끈기였다. 유통 분야는 PDA 최대 공급처, 이 분야에서 단골이 생기자 국외 바이어들도 조금씩 문을 두드렸다. 벌어들인 수익은 바로 R&D에 쏟아 부었다. 산업용 PDA 시장 발전 방향은 무궁무진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블루버드소프트는 프린터 · 결제처리 · POS · CDMA 통신 등 다양한 기능을 구현하는 제품을 연이어 내놓았다.
“PDA는 고객의 요구에 철저히 맞춰 생산해야 합니다. 극단적인 다품종 소량생산 제품이 바로 PDA입니다. 그렇다 보니 대기업이 뛰어들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은 이유는 고객사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품을 발 빠르게 내놓은 덕분입니다.”
2005년에는 `피디온(PIDION)`이라는 새 브랜드도 선보였다. 이 사장의 꼼꼼함은 브랜드 선정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입에 붙으려면 세 글자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온갖 단어를 뒤졌지만, 대부분은 이미 상표 등록이 돼 있었다. 100개 가량 선택지를 놓고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 피디온이다.
그즈음 그는 회사 내부에도 눈을 돌렸다. 이제 자신보다 `우리`를 위해 뛰어야만 했다. 조직 전체의 기초 체력을 보강하는데 등한시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일하고 싶은 직장을 만드는 데 힘쓰기 시작했다. `함께하면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소박한 좌우명이 그의 시선을 직원에게 이끌었다. 책 읽기 프로그램을 열었고, 직원교육 투자비도 대폭 늘렸다.
반면 자신에겐 인색했다. 오래된 `소나타`를 몰고 다녔고, 직원들의 성화에 바꾼 `제네시스`도 국외 바이어 접대용으로 내놨다.
내실을 쌓는데 집중한 덕분일까. 지난해부터 수출 비중이 50%를 넘어섰다. 올해는 제조 물량의 75%가 수출된다. 미국 · 아프리카 · 유럽 · 남미까지 블루버드소프트의 PDA가 피디온 브랜드를 달고 곳곳을 누빈다.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수준 아닐까 싶은데, 이 사장은 아직도 허기지다.
“아직 처음 설정했던 목표의 10%밖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장은 서두르거나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는 생각은 없다. 적어도 세계 3위 안에 들 때까지는 PDA에 집중한다는 게 그의 목표다. 일단 종합 산업용 기기 브랜드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고민을 이어간다. `전략상의 오류는 무엇일까? 내일은 어떻게 일을 꾸려나가야 할까?` 중학생 때부터 꿔왔던 꿈, 역사책에 실릴 만큼 훌륭한 인물이 될 때까지, 이 사장 앞에 놓인 모든 일은 `Just beginning`이다.
박창규기자 k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