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이 등장하면서 우리 모두 노래를 잘 부르게 됐다. 내가 부를 노래를 위해 반주가 준비되어 있다니,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애창곡 가사도 외우지 못하게 됐다.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화면에 가사가 줄줄이 쏟아지니 굳이 암기할 필요가 없다.
휴대폰은 우리 머릿속의 전화번호도 지우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그 많은 숫자를 외우고 있어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초성만 누르면 11개의 숫자가 자동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집사람 전화번호도 문뜩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내비게이션을 달고부터는 운전이 참 쉬워졌다. 목적지 전화번호나 주소를 입력하면 알아서 찾아간다. 운전자는 앞만 보고 가면된다. 참 편리해졌다.
휴대폰이 공중전화를 없애버렸다면 김치냉장고는 김장독을 없애버렸다. 김장은 거의 첫눈이 올 때쯤에 시작된다. 겨울 내내 모든 먹을거리는 김치와 궁합을 맞춘다. 밥상의 반은 김치고 그래서 김장은 그해 마지막 결산작업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들이 뒷마당에 묻던 김장독이 사라졌다. 김치냉장고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한겨울 삼삼오오 사랑방에 모여 앉아 고구마와 함께 김장독에서 갓 꺼내온 살얼음 김치를 맛보는 것은 이제 추억이 됐다. 사라짐이 있어 추억을 되새긴다.
신혼부부에게 김치냉장고는 필수 혼수가전이다. 지금까지 김치냉장고가 편리함이었다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식탁의 동반자다. 아삭하고 톡 쏘는 김치맛을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균일한 온도로 보관하면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 스탠드형이 등장하면서 주부들의 허리통증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 구석구석 순환되는 냉각은 배추속 양념까지 맛을 입힌다.
다시 김장철이다. 배추대란이 수그러들면서 김치냉장고를 찾는 손들이 분주하다. 배추값이 내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운 가격에 비싼 김치를 오래도록 아껴 먹으려는 심리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 칸칸마다 다른 맛을 낸다. 냄새 섞임도 없다. 저마다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비자 요구에 제조사가 눈높이를 맞춘 셈이다. 이제 어머니의 손맛은 겨우내 김치냉장고에서 서서히 발효된다. 겨울도 서서히 발효된다.
김동석기자 ds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