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 시작과 끝<23>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23>



`1초 생활권 시대` 신호탄 `초고속정보통신망 사업`



사진-김영삼 대통령이 5월 29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APEC정보 · 통신장관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1994년 11월 10일.

체신부가 드디어 `1초 생활권 구현`을 위한 청사진을 국민 앞에 내놓았다. 초고속망 국가로 가는 최종 설계도이자 안내도였다. 산업화에 뒤진 한국이 국가차원에서 정보화 퀀텀점프에 시동을 건 것이다.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기획단(단장 박성득 체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은 이날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 종합추진계획안을 발표했다. 기획단 출범 3개월여 만이다.

기획단은 2015년까지 전국에 정보고속도로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계획안에 따르면 국가정보통신망, 공중정보통신망, 선도시험망, 관련기술개발, 시범사업과 여건정비 등 5개 분야를 3단계로 나눠 초고속정보통신기반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박성득 기획단장의 회고.

“당시 정보통신분야의 기초 기술은 우리가 선진국에 비해 다소 부족하지만 생산과 응용 분야에서는 선진국과 경쟁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보고 추진계획안을 수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요도 불확실한데 왜 공공자금으로 선행투자를 해야 하느냐는 반론에 부딪히기도 했어요. 이에 사업을 세분화해 공공자금과 민간자본으로 해야 할 부문으로 구분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체신부는 당초 이 안을 11월 7일 확정했으나 공청회 일정 등의 이유로 10일 발표했다.

체신부는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관계부처협의를 마친 후 11월 말까지 초고속정보화추진위원회 의결을 거쳐 확정할 방침이었다. 기획단은 이날 오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공청회를 열었다.

토론자로 참석한 각계 전문가들은 다양한 응용서비스개발과 관련법 제도정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초고속망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강력히 추진해야 하며 체신부 산하 초고속망구축기획단을 대통령 직속기구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토론자들의 당시 발언 요지를 들어보자.

▲박한규(연세대 교수)=망구축기획단과 10개 부처 전담반뿐 아니라 모든 부처가 네트워크화 된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추진해야 하며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김건중(삼성전자 전무)=초고속망구축 성공은 민간기업의 적극적인 참여가 관건이다.

▲이상식(종합유선방송위원회 연구위원)=위성사업 등 무선과의 연계계획을 보완,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의 위험을 막아야 한다.

▲김현진(현영시스템 사장)=단순한 기술개발투자보다 연구개발 결과를 인정해주는 제도가 기업참여를 유도하는데 더욱 중요하다.

▲여인갑(데이터제너럴코리아 사장)=시범사업은 하나가 아닌 2~3개를 경쟁적으로 선정해서 추진함이 바람직하다.

▲이달곤(서울대 교수)=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망구축기획단을 SOC(사회간접자본)기획단과 같이 대통령직속기구로 위상을 높여야 하고 정규조직화가 필요하다.

▲노상국(전자신문 주필)=현재의 기획단위상으로는 사업추진에 한계가 있으므로 대통령직속기구화해 각 부처의 업무를 독려하는 입장이 돼야 한다. 민 · 관협의회등을 구성해 국민여론을 적극 수렴, 민간의 참여가 요식화되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

체신부의 이런 방침은 미완에 그쳤다. 그해 12월 4일 김영삼 대통령이 대폭의 정부 조직개편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체신부는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됐다. 개각에서 윤동윤 체신부 장관(한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이 물러나고 경상현 체신부 차관이 첫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이 사업의 실무책임자인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기획단장도 바뀌었다. 박성득 단장이 정통부 기획관리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정홍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 LG데이콤 부회장 역임)이 기획단장을 겸임했다.

그러나 기획단장을 제외한 나머지 인력이나 조직에 대한 변동은 없었다. 천조운 부단장이 구축단 실무를 계속 담당했다.

정부 조직 개편과 개각 등으로 그해 12월은 행정부 분위기가 뒤숭숭했지만 기획단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은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이 21세기 고도정보화사회의 핵심기반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오직 일에만 전념했다.

7개 부처와 산하기관 등에서 기획단으로 파견 나와 얼핏 보면 인적 구성이 외인부대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기획단 구성원들은 끈끈한 동료애로 뭉쳐 일했다.

노준형 기획총괄반장(정통부장관 역임, 현 서울과학기술대 총장)의 기억.

“기획단장은 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이 겸임했습니다. 그래서 기획단 실무는 천조운 부단장이 총괄했습니다. 당시 기획단장이나 부단장이 탁월한 리더십과 문제 해결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일하는데 문제가 있으면 위에서 이를 다 해결해 줬습니다. 기존 업무라면 부처 파견자들이 본부 간섭으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파견자보다 초고속망 업무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본부에 없었습니다. 본부에서 간섭을 하고 지침을 내려야 갈등이 생길 텐 데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가는 상황이어서 본부의 간섭이나 훈수 등이 전혀 없었습니다. 파견 나온 인력들이 당시 그 분야 전문가들이라 간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 반장 아래서 기획총괄계장으로 일했던 서홍석 사무관(현 우정사업본부 예금산업단장)의 말도 그와 일치했다.

“저는 천 부단장이 불러서 기획단에 들어 왔습니다. 과거 천 부단장이 장관 비서관 시절 저는 장관 수행비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구축단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각 부처와 산하기관 등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한마음처럼 호흡이 척척 맞았습니다. 모두 국가 미래를 내다보며 일했어요. 당시 함께 근무하던 사람들이 파견이 끝난 후에도 모임을 만들어 만나곤 했습니다.”

한 해가 막을 내리는 1994년 12월 30일.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정부조직개편 후 첫 확대경제장관회의를 주재했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세 가지 현안 업무를 보고했다.

“정보통신부 출범을 계기로 정보산업육성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다음은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과 1995년 5월에 열린 APEC정보 · 통신장관회의 개최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소프트웨어산업을 중점 지원하고 핵심통신기술 연구개발을 추진하겠습니다.”

1995년 3월 14일 오전.

초고속정보화추진위원회(위원장 이홍구 국무총리)는 이날 회의를 열어 지난해 11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기획단이 마련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종합추진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이에 따라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은 국가사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와 관련, 정부는 오는 4월부터 6월까지 부처별로 정보화추진계획을 구체화,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이홍구 국무총리(현 중앙일보 고문)는 “정보화야말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 우리나라를 21세기 세계중심국가로 진입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며 “정보통신부 신설을 계기로 초고속정보통신기반 구축사업이 촉진될 수 있도록 계획내용을 더욱 구체화하고 보강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가운데 1995년 5월 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제1차 APEC(아태경제협력체)정보 · 통신장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1994년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APEC정상회의에 참석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제의해 열린 것이었다. APEC 18개 회윈국 대표단과 APEC사무국관계자 등 340여명이 참석했다.

김 대통령은 첫날 오전 회의에 참석, 연설을 통해 한국이 추진하는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 사업을 소개했다.

김 대통령은 “한국은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에 2015년까지 모두 60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며 “한국은 이 사업 추진에 있어 앞선 나라의 경험과 기술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아울러 우리의 경험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나라와도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의는 APII(아시아 · 태평양 지역정보통신기반)추진을 위한 서울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APII는 아시아 · 태평양지역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 시간과 공간적 장벽을 허물고 경제공동체로서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회원국들의 정보통신기반구조를 확충하고 고도화하며 국가 간 자유로운 연동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이 회의를 주재한 경상현 장관의 회고.

“한국이 APII를 제안했습니다. 회의를 통해 아 · 태 정보공동체를 더욱 구체화했습니다. 한국이 첫 번째 회의의 개최국인데다 서울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각국 간 협력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한 뜻깊은 국제회의였습니다.”

서울선언문은 “모든 회원국이 초고속정보통신기반 구축을 위해 가능한 APII의 5대 목표와 10대 원칙에 부합되고 상호 보완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각국의 정보 · 통신장관이 채택한 5대 목표는 △상호접속되고 연동가능한 역내 초고속정보통신기반의 구축 및 확충 △정보통신 기반구조의 발전을 위한 회원 간 기술협력 장려 △자유롭고 효율적인 정보유통의 증진 △인적 자원의 개발 및 교류 강화 △APII 발전에 적합한 정책 및 규제환경 조성 장려 등이었다.

각국 대표들은 APII 구축은 아시아 · 태평양 지역의 공동번영을 이룩하고 경제공동체로서의 초석을 다진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 회의를 정례화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2회 회의는 호주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고 이틀간의 일정을 끝냈다.

한국은 이에 앞서 5월 24일부터 26일까지 신라호텔에서 각국 고위 관계관회의를 열어 우리가 제의한 APII 목표와 추진 원칙 · 세부행동 계획 등과 정보 · 통신장관회의에서 채택할 서울선언문과 공동발표문 등에 관해 논의 했다. 한국 측 수석대표는 강상훈 정통부 정책심의관(청와대 정보통신비서관 ·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역임, 현 앤씨소프트 감사)이 맡았다.

이 국제회의는 한국이 아 · 태지역의 정보통신 주도국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한국의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사업을 이들 나라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