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 시작과 끝<24>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24>



사진=1994년 1월 13일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사업을 3단계로 나눠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보고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는 박성득 체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왼쪽부터), 이계철 체신부 차관, 김 대통령, 윤동윤 체신부 장관.



초고속망 후일담



한국은 그동안 세 번의 `IT퀀텀 점프`를 했다.

첫 번째는 TDX 개발이다. 이로 인해 전화 적체를 일거에 해소했고 1가구 1전화시대를 열었다. 두 번째는 CDMA 개발이다. 이는 휴대폰 강국을 실현했다. 세 번째가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이다. 이 사업은 1초 생활권 시대를 열었다. TDX개발에는 오명 체신부 장관(교통 · 건설부 장관, 과기부 총리, 건국대총장 역임, 현 웅진에너지 · 폴리실리콘 회장), 두 번과 세 번째는 윤동윤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들 사업의 특징이라면 시작과 끝이 모두 창대(昌大)했다는 점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을 이렇게 평가했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초고속정보통신망에 대한 심층 연구와 전문가 의견을 수렴을 거쳐 1995년 3월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 종합추진계획`을 확정한 바 있다. 이 종합계획에는 2015년까지 총 45조여원을 투입해 `정보고속도로`를 구축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후 계획에 따라 초고속국가망 구축 사업이 착실히 진행돼 1997년 말까지 전국 80개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광기간 전송망이 완성, 초고속 정보통신망의 골격이 구축됐다.”(김영삼 회고록)

이 사업에 얽힌 후일담(後日談)이 많다.

사업 확정까지는 산고의 아픔에 비유할 정도로 진통의 연속이었다. 부처 서열 14위. 그런 체신부가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을 범국가사업으로 추진하는 일이 말처럼 쉬울 리가 없었다.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정통 체신관료로서의 이력, 쌓아온 전문성과 소신, 추진력을 바탕으로 이 일을 성사시켰다. 그는 카리스마와 활력이 넘치면서 소탈함도 겸비해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각 부처에서 인력을 파견받아 초고속정보통신망사업의 기획단을 체신부 안에 발족한 것이다. 그 과정에 관련부처 장관 간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다. 이회창 국무총리(현 자유선진당 대표) 주재 장관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져 회의가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윤 장관의 회고.

“문민정부 출범 후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에 관한 논의를 했어요. 당시 미국 클린턴 정부는 앨 고어 부통령 주도로 정보고속도로 구축을 추진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장관실에서 윤창번 박사(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하나로텔레콤 사장 역임, 현 김앤장법률사무소 고문) 등 전문가들과 미래 과제에 대해 논의했어요. 그 결과 초고속정보통신망을 구축하되 체신부만으로는 안 되니 범국가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업 추진주체를 놓고 부처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초고속정보통신망추진위원장은 국무총리가 맡기로 했다. 체신부는 위원장을 대통령이 맡기를 희망했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다음은 실무위원장이었다. 이 총리는 4월 9일 토요일 오후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실무위원장을 놓고 정재석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윤 장관 간에 팽팽한 격론이 벌어졌다. 정 부총리는 경제기획원 측이 위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 장관은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이 맡아야 한다`고 맞섰다. 국무위원 간에도 찬반이 엇갈렸다. 상공부와 공보처는 정 부총리 주장에 찬성했다. 정치인 출신 장관들은 윤 장관 주장에 동의했다. 윤 장관은 특유의 소신과 배포로 기존 입장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1시간 반이나 격론을 벌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 총리가 결론을 유보하고 회의를 중단시켰다.

그 다음 주 월요일 오전. 이 총리가 윤 장관에게 전화를 했다.

“윤 장관 오늘 점심을 같이합시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종합청사 내 귀빈식당에서 배석자 없이 만났다.

이 총리기 말문을 열었다.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 사업은 범국가적인 일입니다. 전체를 총괄하자면 총리실이 실무위원장을 맡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정 부총리가 저렇게 주장을 하니 윤 장관이 양보를 했으면 합니다.”

이 총리가 중재에 나선 것이다.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그 대신 각 부처의 인력을 파견받아 초고속망 구축과 운용을 총괄하는 기획단은 체신부 안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윤 장관은 실리를 선택한 것이었다.

1994년 4월 14일 이 총리 주재의 1차 추진위가 열려 현안을 처리했다.

체신부 고위관계자인 A씨는 “그 당시 윤 장관의 추진력과 인적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체신부 안에 기획단 발족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초대 기획단장은 박성득 체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이 겸임했다. 정통부 출범 후에는 정홍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LG데이콤 부회장 역임)이 기획단장을 맡았다. 두 사람은 통합의 리더십으로 기획단을 이끌었다. 부단장은 천조운 국장이 계속 맡았다. 1996년 6월 기획단은 정통부가 국가 정보화를 담당할 정보화기획실을 설치함에 따라 정보화 업무를 기획실로 넘긴다(이 과정은 나중에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기획단에는 7개 부처와 산하기관 등에서 인력이 파견 나왔다. 이들은 휴일도 반납했다. 고단한 업무로 몸져 누운 직원도 있었다. 이들 외에 체신부 인력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불러 일을 시켰다.

기획단장과 부단장 등은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경제기획원 등에 업무 협의를 위해 뛰어 다녔다. 한이헌 대통령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 교장)과 추준석 경제비서관(중소기업청장 역임, 현 동아대 석좌교수)은 이 사업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강봉균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정통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재경부 장관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과 이석채 경제기획원 차관(정통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역임, 현 KT 회장) 등과도 업무 협의를 하러 다녔다.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법.

1995년 12월 개각에서 이석채 경제기획원 차관이 정통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1996년 8월 이 장관이 대통령 경제수석으로 발령나자 후임으로 강 실장이 정통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노준형 기획총괄반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서울과학기술대 총장)의 기억.

“제가 단장을 수행하고 가서 업무 보고를 하곤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들이 차례로 정통부 장관으로 발탁이 됐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까요.”

1999년 7월 5일.

일간 신문마다 정보통신부 천조운 이사관의 부음 소식이 실렸다.

1953년생. 대학 3학년 재학 중 1973년 행시 14회에 최연소 합격자의 기록을 남겼다. 체신부 장관 비서관, 총무과장, 통신기획과장, 기획단 부단장, 정보화기반심의관(1996년 7월), 전파방송관리국장(1996년 12월), 중앙전파관리소장(1997년 8월 15일)을 거쳐 1999년 7월 4일 별세했다.

병명은 간암.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강건한 체질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가 한창 일할 나이에 타계한 것은 감사원 감사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단 실무를 총괄한 그는 감사원 감사에서 각종 의혹에 대해 총대를 메고 해명했다. 이로 인해 그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감사원은 1996년 7월 5일 정통부에 대한 감사에서 초고속국가정보통신망 사업에서 370억원의 예산 과다계상 등 중대한 과실이 적발됐다고 발표했다. 감사원은 기획단의 핵심 관계자인 천조운 부단장(당시 정보화기반심의관) 등을 징계하라고 정통부에 통보했다.

이와 관련한 정통부 고위관계자 B씨의 말.

“이권과 관련해 관련 업체에서 감사원에 진정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감사원은 1998년 11월에도 국가정보화 사업에 대한 특별감사를 했어요. 휴일도 없이 미래를 위해 일한 사람이 감사원 감사를 받고 더욱이 징계 통보를 받았다면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이보다 앞서 1995년 11월 13일 오후 3시 박창환 정통부 부이사관(국제협력기획과장)이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져 별세했다. 그도 구축단 업무와 관련해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미담(美談) 하나.

그가 타계한 후 이건수 동아일렉트론 회장이 유가족 돕기에 나섰다. 고인의 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전액 부담했다. 당시 중고생이던 두 아들은 국내 명문대학을 졸업했다. 이 중 큰아들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지난 3월 사법연수원에 입소했다. 둘째는 국내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사법고시에 합격한 큰아들에게 세상 견문을 넓히라며 올 초 해외 여행도 보내주었다고 한다.

1995년 5월 노준형 반장이 정통부 통신망과장으로 발령이 나자 경제기획원에서 김동연 서기관이 파견나왔다. 그는 기획단에서 국가계획반장을 맡았다. 정 실장과 천 부단장이 김 반장의 업무 능력을 높이 사 `정통부에 남으라`고 붙잡았으나 그는 경제기획원으로 복귀했다. 그 후 경제기회원에서 정보화담당관과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등을 거쳐 현재 300조원이 넘는 국가예산을 다루는 재정부 예산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에 대한 박성득 초대 기획단장의 회고.

“이 사업은 우리나라 정보통신사업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기폭제가 됐고 인터넷 성장과 궤를 같이하면서 한국을 IT 일등 국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홍식 기회단장의 회고록 증언도 이와 같다.

“이 사업의 성공적인 추진 결과로 한국은 세계 일류 정보통신 인프라 보유국이 됐습니다. 그 인프라를 기반으로 우리 IT산업이 도약해 왔습니다.”(한국 IT정책 20년)

이런 노력 끝에 한국은 인터넷강국의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고속정보통신망구축사업은 한국정보화의 젖줄이자 국민 생활혁명의 힘찬 엔진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