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 시작과 끝<25>
한국통신 노사분규
호사다마(好事多魔)인가. 아니면 IT성장통(成長痛)인가.
1995년 정보통신부는 새해 벽두부터 IT강국을 향한 힘찬 발걸음으로 활력이 넘쳤다. 그런 정통부 앞길에 메가톤급 지뢰가 터졌다. 한국통신(현 KT)의 노사분규였다. 국가기간 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의 노사분규는 1995년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노란 개나리가 동구 밖 언덕길을 화사하게 꾸미는 4월 13일 목요일.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은 외부 일정으로 장관실을 비웠다. 조용하던 장관 비서실 밖 복도가 갑자기 왁자지껄 소란해졌다.
“왜 이렇게 밖이 소란스럽지?”
비서실 직원이 밖을 내다보는 순간 한국통신 노조원들이 장관 비서실로 들이쳤다. 유덕상 노조위원장(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역임, 현 KT 춘천지사 근무)이 앞장섰다.
정경원 장관 비서관(우정사업본부장 역임, 현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이 이들을 가로막고 나섰다.
“아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노조라지만 이건 심하지 않습니까. 한국통신 사장실에도 이런 식으로 몰려갑니까?”
유 위원장은 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이 장관실로 몰려 온 것은 이날 오전 정통부 직원이 게시판에서 ‘시외전화 재벌 특혜정책 포기하라’는 노조의 유인물을 뗐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노조는 장차관 출퇴근 시간에 맞춰 농성을 계속했고 직원들의 출근도 방해했다.
정통부와 한국통신은 4월 26일 노조간부 64명을 서울 종로경찰서에 고소했다.
정통부 청사 불법점거 농성과 1994년 12월 한국이동통신 주식매각 특별이익금 등 안건을 심의하는 한국통신 이사회장에 천장을 뚫고 침입, 회의를 방해했다는 것이 고소 내용이었다.
한국통신 노조는 한국통신 민영화와 통신시장 개방 반대, 그리고 공기업의 임금 가이드라인 철폐 등을 요구해 왔다.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요구였다.
한국통신은 5월 16일 장관실 점거와 이사회 방해 등 불법행위를 한 노조간부 64명을 중징계하겠다고 밝혔다.
노사분규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입장은 단호했다. 김 대통령은 1995년 1월 9일 정통부 새해 업무보고 시 “올해를 불법 노사행위 추방의 해로 정해 엄정한 법질서를 확립하라”고 말하는 등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사화합과 산업평화를 해치는 불법파업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19일 국제언론인회(IPI) 한국위원회 이사진과 오찬을 함께 했다. 김 대통령은 한국통신사태에 관해 “국가전복 저의가 있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법을 어기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날 오후 홍재형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현 민주당 국회부의장)과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 이형구 노동부 장관(세종대 정보통신대학원장 역임), 박운서 상공부 차관(파워콤 회장 역임) 등 4개 부처는 합동기자회견을 열어 대국민호소문을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밤 청와대에서 국무위원과 수석비서관 등과 만찬을 했다. 김 대통령은 만찬 도중 한국통신의 노사사태를 TV로 보고 “저렇게 되도록 놔두었냐”고 질책했다.
경 장관은 이날 밤 10시경 정통부로 돌아와 긴급 간부회의를 열었다. 한국통신 사태가 악화되자 우크라이나를 방문 중이던 이계철 정통부 차관도 예정을 앞당겨 귀국했다.
한국통신 사태는 정부의 강경방침과 노조의 준법투쟁 등 단체행동으로 이어졌다.
1995년 5월 21일 서울경찰청은 한국통신이 업무방해 등 협의로 고소·고발한 한국통신 노조위원장 등 노조간부 64명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이튿날 노조 간부들은 명동성당과 조계사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유 위원장 증언.
“정부가 강경하게 나오니까 도리가 없었어요. 노조간부들은 조계사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지요. 저는 다른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무렵, 청와대는 김수환 추기경(2009년 선종)과 회동을 극비리에 추진했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 B씨의 설명.
“6월 초 대통령과 청와대 회동을 추진했습니다. 마지막 성사단계에서 천주교 측이 거부했어요. 청와대 회동을 하면 추기경이 공권력 투입을 양해 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 장관과 조백제 한국통신 사장(명지대학교 연구부총장 역임, 현 서울디지털대학교 총장)은 5월 26일 한국통신 노조 간부들이 농성 중인 명동성당과 조계사를 잇따라 방문해 농성자들이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조 사장은 수시로 두 곳을 찾아 협조를 요청했으나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5월 29일 감사원은 한국통신에 대한 감사결과를 정통부에 통보했다. 감사원은 한국통신이 예산을 부당 전용하고 방만 경영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 무렵, 서울 신라호텔에서 APEC 정보·통신장관회의가 29일부터 이틀간 열렸다. 30일 저녁 모든 일정을 마친 경 장관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리에 조 사장이 들어왔다. 국제회의를 무사히 마친 후여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밤 11시 TV뉴스를 시청하는데 감사원 감사결과와 조 사장의 해임 요구 보도가 나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경 장관도 사전에 이를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에 대한 조 사장의 회고.
“감사원의 발표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왜곡 발표였습니다. 방만 경영은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을 준 것을 말하는데 저는 취임 후 전임자 수를 80명으로 대폭 줄였습니다. 전임자에게 임금을 주지 않은 기업은 없었어요. 잘못한 점을 지적했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30일 서울 종로경찰서 이택순 서장(경찰청장 역임)과 중부경찰서 최광현 서장(해양경찰학교장 역임)이 각각 조계사와 명동성당을 방문해 농성 중인 노조 간부들의 연행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경찰은 6월 6일 오전 8시께 한국통신 노조간부 13명이 농성 중인 서울중구 명동성당과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 경찰병력을 전격 투입해 전원 연행했다.
조 사장의 증언.
“한 달 반 정도 노조 측과 협상을 했어요. 임금 협상안도 합의했는데 노조 찬반 투표에서 부결됐어요. 나는 공권력 투입은 마지막 수단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날 오후 한국통신 노조는 강제 연행에 반발해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기로 했다. 조 사장은 간부들을 긴급 소집했다. 그리고 탑골공원으로 달려갔다. 간부들과 경찰들은 조 사장이 탑골공원에 나타나는 것을 말렸다. 흥분한 노조원들과 물리적 충돌을 우려해서였다.
조 사장의 상황 설명.
“나는 돌멩이를 맞더라도 가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사장이 나서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노조가 만들어 놓은 연단에 올라가 노조원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30분 만에 노조원들을 해산시켰다. 경찰은 노조원들을 연행했다.
정부는 이날 오후 조백제 한국통신 사장을 전격 경질하고 후임에 이준 예비역 육군 대장을 임명했다.
이와 관련한 조 사장의 기억.
“오후 3시경 회사로 오는 도중에 경 장관이 전화를 하셨어요. 그런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더니 말을 안 해요. 회사로 와서 쉴까 하다가 장관께 결과를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해 장관실로 올라갔더니 서랍에서 팩스로 받은 이력서를 하나 내보였습니다. 후임 사장 이력서라며 경질사실을 이야기하더군요.”
그는 4시경 퇴임식을 열고 2년 반가량 몸담았던 한국통신을 떠났다.
교수 출신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을 거쳐 한국통신 사장에 취임한 그는 한국통신의 대외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박사급 인력들을 집행라인에 투입, 민영화의 기틀을 다졌고 부조리와 인사청탁을 사장이 앞장서서 척결했다고 한다.
노사관계에 대한 조 사장의 말.
“노사는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노조가 경영자 역할을 하라고 하면 안 됩니다. 경영자는 공명정대하고 투명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노사관계는 오케스트라 연주와 같습니다.”
후임 이준 사장은 육사 19기로 육군21사단장과 군수본부장, 1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나중에 국방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이 사장은 취임 후 6월 12일 기자회견을 열어 노사교섭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양 측의 입장차이가 좁혀지지 않자 한국통신 측은 7월 15일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중재신청을 냈고 중노위는 노동쟁의를 중재에 회부키로 했다. 중노위는 7월 28일 임금 5.7% 인상을 내용으로 하는 중재안을 내놓았으나 노조 측이 이를 거부했다. 한국통신 사태는 7월 30일 도피 중인 유 위원장이 부산역 집회를 마친 후 경찰에 자진출두 형식으로 자수했다.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유 위원장은 당시 고속모뎀이 장착된 486노트북과 휴대폰, 무선호출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노조파업을 지휘했다.
그의 말.
“당시 한국통신은 하이텔(현 파란)이란 PC통신서비스를 하고 있었어요. 노조원들이 블로그 같은 홈페이지를 구축해 운영했어요. 그곳을 통해 투쟁지침을 내렸습니다.”
퇴임한 조 사장은 당시 감사원장을 상대로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는 1년 6개월 후에 주변의 권유와 대승적 차원에서 소송을 취하했다. 그는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변호사 비용으로 전액 사용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2010년 KT노사는 첫 무분규 임단협을 체결했다.
KT노동조합은 지난해 민주노총을 탈퇴한 데 이어 지난 3월 5일 서울 서초동 KT올레캠퍼스에서 이석채 회장과 김구현 노조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취약계층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벌이는 등 신노동운동(HOST운동)을 전개한다고 밝혔다. 화합과 나눔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겠다는 뜻이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진통을 거쳐 한국통신은 민영화의 길을 걸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