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초과학 연구환경은 이전에 비하면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졌던 ‘기초과학에 대한 자긍심’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지난 10월 5일 발표된 안드레 가임과 콘슨탄틴 노보셀로프 맨체스처대 교수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소식은 국내 물리학계에 아쉬운 탄성을 자아냈다. 처음으로 단층 그래핀을 분리해 낸 공로는 이들에게 있지만 그래핀의 ‘양자홀 효과’를 규명해 상용화 기술 연구의 문을 연 사람은 한국인인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지난 11일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열린 다산컨퍼런스에서 2010년 노벨상 수상 탈락 이후 처음으로 기자들과 만나 “한국의 어린 학생들이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히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에 대해 서글픈 심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기초과학에 대해 당장의 시장가치 잣대를 들이대선 안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큰 돈을 쏟아부으며 하는 천체나 물리 연구 중 많은 수는 응용 단계도 염두에 두지 않고 하고 있다”며 “창의적인 기초 연구는 후일 응용 연구의 발판이 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에는 홍병희 성균관대 교수·임지순 서울대학교 교수·손영우 고등과학원 교수·정현식 서강대 교수 등 국내 물리학계를 이끄는 대표학자들도 함께 자리해 기초과학 경쟁력 강화를 입을 모아 주장했다.
그래핀 응용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홍 교수는 “사실 기초과학 연구를 제안하면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따내기 쉽지않다”며 “응용연구에 대한 전폭적 지원이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을 여기까지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해왔지만 기초연구에 대한 필요성이 희석되는 부작용도 있다”고 말했다.
임지순 서울대학교 교수도 “대학교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지만 정부 출연연은 성과를 내야한다는 조급함에 장기적인 기초연구를 전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기초연구까지 ‘경제효과 얼마’ 식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올해에도 과학분야 노벨상을 2명이나 수상해 부러움을 자아낸 이웃 나라 일본에선 오래 전부터 이화학연구소에 대규모 자금지원을 해오는 등 기초과학 지원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정현식 서강대 교수는 “당장 돈이 안되도 먼 앞날을 내다보는 연구를 위한 자금은 정부에서 나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한편 김필립 교수는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노벨상과 관련한 속내도 털어놨다. 그는 “2002년부터 그래핀 분리를 위한 연구를 시작했고 마침내 10장의 원자층을 떼어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며 “그 직후 맨체스터 연구팀이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진행한 논문 초고를 받아 보고 굉장히 창의적이며 단순한 방법으로 1장 분리에 성공했더라.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노벨상 수상과 함께 소개됐던, 스카치테이프를 이용해 흑연에서 단층 그래핀을 분리하는 그 기법이다.
김 교수는 “이번에 수상한 맨체스터 그룹은 그야말로 이 분야를 선도해 나간 그룹이고 나는 따지자면 2등쯤 된다”며 “노벨상 수상에 대한 국내외의 기대 여론 자체가 커다란 짐이었는데, 이제 벗어버려 홀가분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