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대기업으로부터 기술유출을 당한 중소기업들은 사후 대책이 없어 속으로 끙끙 앓는 경우가 많다고 하소연한다.
심증은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 없어 법적 대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구두계약으로 제품을 개발하다 기술을 뺏겨도 대기업이 오리발을 내밀면 어쩔 수 없이 당한다. 제품 하도급과 관련된 정식 계약서 한 장만 있어도 대응할 수 있지만 몰라서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유출사고가 터져도 법률적 전문지식 등이 거의 없어 경찰 수사의뢰를 엄두조차 못 내는 사례도 많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중소기업 기술유출 문제를 전문적으로 지원할 정부의 전담 지원체계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갈수록 늘어나는 기술유출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고, 초동 수사를 강화해야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의 지원체계는 교통정리가 제대로 안 돼 오히려 혼선을 빚어왔다. 올해 예산에 중소기업청 기술유출방지 시스템 구축 지원사업 예산 전액이 삭감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지식경제부와 중기청의 기술유출방지 사업이 중복 논란을 빚어 되레 예산이 줄어드는 화를 자초했다.
다행히 올해 국무총리실 조정을 통해 중소기업 기술유출방지 시스템 구축 사업이 중기청으로 일원화됐지만 예산확보를 위한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다.
권형석 율목 특허법률사무소 변리사는 “일반적으로 기술유출은 대기업이나 회사 직원에 의해 유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이들 경우 대부분 법률적 지식이나 기술유출 예방에 대한 사전교육이나 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만큼 이를 지원해줄 전담조직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내부 직원이 퇴사해 경쟁업체로 이직하거나 창업할 경우 기술유출이 손쉽게 이뤄지지만, 내부 직원이 이를 범죄행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사전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청이 올해 처음 실시한 현장 컨설팅 및 교육을 정례화하고 이를 꾸준히 전개할 지원조직이 시급한 실정이다. 법률 컨설팅 등 전문 프로그램을 상시적으로 운영하는 방안도 모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담 지원조직이 마련되면 대기업의 기술 빼가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이를 권고하는 방안도 추진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기술유출이 범죄인 만큼 경찰, 검찰 등 수사당국과 협력체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동안 중소기업청이 상담을 통해 범죄 사실을 인지하더라도 수사권이 없는데다 전문성이 떨어져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올해 중기청과 경찰청이 중소기업 기술유출에 공동 대응하기로 한 것은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경찰청은 중기청과 협력 양해각서(MOU)를 교환한 이후 지난 7월 ‘산업기술유출수사대’를 발족하기도 했다.
서울, 부산, 인천, 경기, 경남 5개 지방경찰청에 산업기술유출수사대가 가동되면서 기술유출 범죄를 잇따라 적발하는 성과도 나오고 있다.
경찰청이 수사대 출범 이후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검거한 기술유출 사건만 합쳐도 기술유출 피해액이 1조원을 넘어 중소기업 기술유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권형석 변리사는 “기술유출이 범죄인 만큼 중소기업청뿐만 아니라 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경찰, 검찰 등과 공조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며 “공조체계가 안 되면 적어도 협조체계라도 만들고 이를 강화시켜 나가야 범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소기업 기술유출 지원 정책을 펼칠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방안도 정부나 국회를 중심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중소기업 기술유출이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지만 예산이나 지원책이 미진한 것도 이를 지원할 근거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기청은 그동안 중소기업 기술유출방지시스템 구축 지원사업을 정보화지원사업 일환으로 진행했다. 중소기업기술혁신촉진법에 명시된 정보화 지원 항목이 근거가 된 셈이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다 보니 올해 예산 책정과정에서 기술유출 방지사업은 후순위에 밀렸다는 평가다. 중소기업 기술유출 방지 지원 근거법을 마련하면서 앞서 언급된 지원체계에 대한 근거도 함께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장지영기자 jyaj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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