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잠수정 ‘프로테우스’에 탑승한 과학자들은 뇌사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 주변 혈관에 주사된다. 질병 원인을 찾아내며 인체를 탐험하던 도중 급작스러운 혈류에 휘말리면서 심장·폐·간 등 장기 곳곳을 방황한다. 이들은 잠수정 밖에서 작업 중 해파리처럼 생긴 항체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기도 하는데….
‘아바타’로 유명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리메이크를 준비 중인 영화 ‘마이크로 결사대’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들이 혈관 두께보다 작은 잠수정을 타고 몸 속 곳곳을 탐험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등장인물이 인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마이크로미터(㎛) 단위까지 축소할 수 있는 미지의 기술 덕분이었다. 마이크로 결사대 본편이 제작된 지 40여년이 지난 지금 과학기술은 프로테우스 같은 잠수정을 개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상상 속의 잠수정 프로테우스 1000분의 1 크기인 나노미터(㎚:10억분의 1) 단위의 입자를 개발하는 데는 성공했다. 자체 동력과 배터리를 내장한 기계장치를 개발하지는 못했지만 바이오·전자·화학 산업에 나노미터 크기의 물질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공상과학영화에서 인간 생활에 혁신적 이기가 될 것처럼 그려지는 마이크로·나노기술이 실생활에서는 인체 유해성과 관련된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잠수정이 혈관을 통과하는 정도의 크기라면 나노미터 입자는 인간 세포벽을 통과할 만큼 미세하기 때문. 일부에서는 나노 입자가 호흡기나 피부로 흡수돼 체내에 축적되면 각종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지난 7월 정진호 서울대 교수팀은 시험관과 동물실험에서 시중의 ‘은 나노’ 제품이 은 자체가 아닌 입자 크기가 독성을 유발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심혈관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규명하기도 했다. 향후 나노 기술이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 경우 나노 입자에 의한 ‘나노 증후군’에 노출될 가능성도 크다.
◇탄소나노튜브는 안전한가=나노물질의 유해성 연구가 국제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지난 2003년 미국항공우주국(NASA) 존슨우주센터 연구팀의 실험이 계기가 됐다.
연구팀은 0.1~0.5㎎의 탄소나노튜브(CNT)를 용액 형태로 쥐의 폐에 주입하고 관찰한 결과 폐 조직을 손상시켰다고 발표했다. 전기·열 전도도가 높고 강도가 다이아몬드만큼 강해 ‘꿈의 신소재’로 각광받던 CNT가 호흡기를 통해 우리 몸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점을 처음 각인시킨 실험이었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과 미국 우드로윌슨 국제학술센터 공동 연구팀도 다양한 크기의 CNT와 석면을 각각 실험용 쥐에 주입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결과 CNT가 석면과 유사하게 쥐의 폐·복부·심장 등에 염증과 병변을 유발했다.
지난 2008년 일본 국립의약식품위생연구소는 CNT를 투여한 쥐에서 종피종이 생기는 것을 확인했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종피종은 석면 등의 발암물질 흡입 시 복강 내에 발생하는 악성 종양이다.
간노 준 도쿄 건강안전연구센터 독성부장은 “석면도 처음에는 그 유해성이 알려지지 않아 피해자가 늘어난 바 있다”며 “CNT 역시 대량생산 전 단계인 지금부터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 미국 환경보호국(EPA) 산하 국립보건환경영향연구소(NHEERL)의 벨리나 베로네시 박사팀은 자외선 차단제와 화장품에 널리 이용되는 산화타이타늄(TiO₂) 나노입자가 신경세포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CNT가 호흡기로 신체에 흡수된다면 산화타이타늄는 피부로 인체에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이다.
◇나노 물질, 유용하지만 그만큼 치명적=나노 물질이 기존 마이크로미터 물질에 비해 치명적인 것은 그 크기가 작아 인체 곳곳에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노 물질은 표면 반응력이 높고 세포막을 투과하는 것이 가능해 호흡기나 피부로 외부에서 쉽게 인체에 유입될 수 있다. 수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미세먼지가 인체 조직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나노 물질은 개별 세포단위에까지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는 셈이다. 특히 나노 물질이 혈액을 타고 체내 곳곳으로 이동하면서 뇌나 심혈관계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보고도 속속 나오고 있다.
귄터 오베르되스터 미국 로체스터의대 교수도 지름 20㎚의 미세입자를 쥐에게 15분 동안 호흡하게 한 결과 4시간 내에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6배 이상 크게 만든 입자를 흡입시켰을 때는 쥐가 죽지 않았다. 입자 크기가 커 신체 내에 흡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자 성분 자체보다 그 크기에 의해 독성이 발생할 수 있음이 실험으로 입증된 셈이다.
또 다른 실험에서도 나노 물질이 체내에 제한 없이 곳곳을 누비고 다닐 수 있음이 입증된 바 있다. 대표적인 것이 뇌 흡수 실험이다. 원래 뇌는 독성 물질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한 울타리가 쳐져 있다. 그러나 오베르되스터 교수팀이 지름 35㎚인 탄소입자를 쥐에 흡입시켜 관찰한 결과 하루 뒤에 뇌의 후각 부위에서 검출됐다. 나노 입자가 신경세포를 거쳐 뇌에 침투한 것으로 분석된다. 만일 이 물질이 독성을 갖고 있다면 뇌에 치명적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
나노기술의 또 다른 부작용은 나노 물질이 중금속처럼 체내에 축적된다는 점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몸 안에 들어온 나노 물질의 98%는 48시간 안에 배출되지만 나머지 2%는 몸의 각 기관에 쌓이게 된다. 이 중 독성이 있는 나노 입자는 치명적이다. 나노입자는 너무 작아 인체의 면역세포가 제거하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예컨대 축구공처럼 생긴 나노입자 ‘풀러렌’은 빛을 쬐면 독성을 갖고 있는 활성산소를 만든다. 활성산소는 DNA를 손상시켜 암 등 질병을 유발한다. 또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나노입자들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면 심한 스트레스를 일으켜 세포 자살을 유도한다.
◇각국 규제 움직임=국가별로 나노물질 수입 및 취급 규제를 추진하면서 새로운 수출 장벽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미국은 항균 목적으로 은나노 기술을 쓴 생활용품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미 EPA는 나노기술을 적용한 세탁기와 식품보관용기·공기청정기 등을 수입규제 대상품목으로 지정했다. 이들 제품을 미국에 판매하려면 생산자는 은나노 입자가 인체나 생태계에 무해하다는 사실을 먼저 입증해야 한다.
지난해 초에는 2개 특정 나노물질에 대해 제조·수입·가공 90일 전에 미 환경청에 사전신고 및 심사를 의무화했다. 또 올해 초에는 독성물질관리법에 의한 제재물질에 다중벽 CNT를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제조물의 인체 유해성에 대한 기준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럽은 나노 물질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규제를 가할 태세다. 지난해 4월 유럽의회가 스웨덴 녹색당 출신 슈리터 의원의 나노기술제품에 대해 강화된 규제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채택하면서 관련 법령 마련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 보고서는 ‘안전보고서 없이는 상용화도 없다(No data, no market)’는 주장을 골자로 화장품 등 나노기술 응용 제품은 안전성 평가가 끝날 때까지 판매가 금지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환경문제 관련 NGO의 네트워크인 유럽환경국은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나노기술에 대해 향후 규제정책을 시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1월 스위스에서 열린 제5회 나노규제 콘퍼런스에서는 관련 토의가 제 1주제로 다뤄지기도 했다.
최근 해외 바이어들은 국내에서 CNT를 구매할 때 인체 무해성 증명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CNT 제조장비 및 제조업체인 제이오의 강득주 사장은 “최근 해외 기업과의 CNT 수출 협상에서 상당수 기업이 인체 무해성 입증을 요구해 수출이 이뤄지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국제적으로도 CNT의 인체 유해 여부가 판정되지 않은데다 평가기준도 없기 때문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지식경제부가 나노제품의 안전성 지침을 마련하고 있다. 지경부는 나노제품 안전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별도의 지침을 마련, 연말까지 KS표준으로 고시할 방침이다.
이번 안전지침은 공장에서 나노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설비 안전규정 쪽에 집중한다. 향후 나노제품의 안전기준을 제정하는 등 순차적으로 안전지침이 마련될 예정이다. 기표원은 특히 유해성 논란이 제기됐던 은나노와 우리나라가 앞서나가고 있는 CNT 등의 안전성 기준은 산업의 중요성 등을 감안해 지침 마련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경부와 기술표준원 관계자는 “나노 제품에 대한 인증절차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지 논의를 전개할 것”이라며 “일단 국가에서 나노 인증을 받으면 나노 기술 및 제품에 대한 안전성을 승인받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석현기자 ahngija@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