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 <28>
정통부 장관 교체 막후
해마다 연말이면 각 부처의 안테나는 청와대로 쏠린다. 개각 때문이다.
1995년 12월 15일 오후.
윤여준 청와대 대변인(환경부 장관, 16대 국회의원 역임, 현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이 기자실로 내려왔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홍구 국무총리(현 중앙일보 고문)를 경질하고 후임 총리에 이수성 서울대 총장(새마을운동중앙회장 역임)을 내정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이 총리 내정자의 임명동의안을 이날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는 18일 오후 2시 본회의를 열어 임명동의안을 처리키로 했다. 총리 경질은 개각의 전주곡이었다. 김 대통령은 국회동의가 끝나는 대로 이 총리를 정식 임명하고 그와 개각에 따른 후임 인선을 협의해 개각을 단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발표에 앞서 이수성 서울대 총장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함께하면서 총리직을 제안했으나 이 총장은 총리직을 고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된 김 대통령의 설득에 15일 오전 총리직을 수락했다.
이 총리 내정자도 기자들에게 “김 대통령으로부터 제의를 받고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 하나 희생해 국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수락했다”고 밝혔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인 국무총리를 놓고 고사한 것도 퍽 드문 일이었다. 장관 자리에도 목을 매 개각철이면 청와대 전화를 기다리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국회는 18일 오후 본회의를 열어 국무총리동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재석 246명 중 찬성 206표로 가결됐다. 청와대는 곧장 이 총리와 협의해 개각을 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공판이 이날 열림에 따라 연기됐다.
12월 20일 오전.
김 대통령은 조각(組閣) 수준의 개각을 단행했다. 부총리와 장관 등 22명 가운데 절반인 11명을 교체했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현 KAIST 겸직교수)을 경질하고 후임에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관(대통령 경제수석 역임, 현 KT 회장)을 기용했다. 이와 함께 청와대 비서실도 개편했다. 비서실장에 김광일 전 의원을 기용하고 한이헌 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 교장)도 바꾸었다. 경제수석에는 구본영 과기처 차관(과기처 장관 역임, 작고)을 임명했다.
정통부 장관 교체의 막전막후를 알아보자.
경 장관은 언제 장관교체를 통보받았는가.
그는 개각 발표 하루 전 장관 집무실에서 경질을 통보받았다고 했다. 이미 개각에 앞서 장관들은 청와대에 일괄사표를 제출해 놓은 터였다. 한승수 비서실장(국무총리 역임, 현 김앤장 고문)이 장관실로 전화를 해 왔다. 당시 대화 내용을 재현해 보자.
“경 장관입니다.”
“한 실장입니다. 대통령께서 그동안 수고 많으셨다는 말씀을 경 장관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고맙다는 말씀도 함께 하셨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경 장관의 회고.
“개각 며칠 전 국무총리가 경질됐습니다. 개각 철이면 장관은 언제나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초대 정통부 장관으로 1년여 일했고 큰 과오 없이 물러나게 돼 퍽 다행이었습니다.”
초대 정통부 장관으로 임명돼 1년여를 재임한 그는 20일 오후 1시 30분 정통부 회의실에서 이임식을 갖고 간부들의 환송박수를 받으며 정통부를 떠났다. 당시 정통부 내부에서는 신규통신사업자 선정업무를 총괄해 온 경 장관이 유임되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과학자로 ICT강국 건설에 헌신한 경 장관은 퇴임 후 가족과 함께 동해안에서 일주일가량 쉬었다가 한국전산원(현 한국정보화진흥원)의 초빙연구위원으로 일했다. 이어 고려대(석좌교수)와 KAIST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현재는 KAIST에서 ICT 인재 양성에 열정을 쏟고 있다.
학교에서 그의 호칭은 다양했다. 어떤 사람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경력을 들어 “장관”이라고 했다. 일부 교수나 학생들은 “교수”라고 불렀다. 그는 어떤 이름으로 부르건 별로 개의치 않았다. 후학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는 “김재익 박사(대통령 경제수석 역임, 작고)를 만난 것이 한국 정보통신 혁명의 거대한 물결에 몸을 맡기는 기회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며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개각에서 가장 유력한 정보통신부 장관 후보로 꼽힌 사람은 누구였을까.
청와대에서 0순위는 한이헌 경제수석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김 대통령이 한승수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한 수석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으니 정통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한 실장이 한 수석에게 “정통부 장관으로 갈 생각이 없느냐”며 입각 의사를 타진했다는 것이다.
한 수석도 “그런 일이 있었다. 내가 정통부 장관 후보 0순위였다”고 확인했다.
한 수석의 증언.
“저는 그 당시 국회로 진출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김 대통령에게 부산지역의 국회의원 공천을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김 대통령의 신임을 받게 된 것은 개혁성과 업무 추진력, 그리고 청렴성 때문이었다.
삼성과 LG, 현대, 대우 등 빅4가 PCS사업권에 눈독을 들였지만 청와대 경제수석실에는 전화나 만남을 통한 청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한 수석과 잘 아는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조차 한 번도 그에게 청탁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청와대 안팎에 퍼진 그와 관련한 일화 하나.
그가 청와대 경제 수석으로 임명된 지 얼마 후 집으로 H그룹에서 술 선물을 보냈다. 짐작컨대 뭉치 돈을 술병 밑에 넣은 듯 했다. 한 수석은 이튿날 아침 아내를 시켜 그룹 사장실로 선물을 돌려주도록 했다. 그의 아내는 오전 10시에 회사 안내 데스크를 찾아 사장면회를 신청했으나 “없다”며 기다리게 했다. 오후 3시까지 기다렸으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도리 없이 신분을 밝혔다. “청와대 한 경제수석의 아내인데 선물을 돌려주러 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외출 중이라던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 내려왔다. 또 O그룹이 모 백화점에 가게를 한 칸 주겠다고 했으나 이도 물리쳤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는 것처럼 이런 소문이 업계에 퍼지자 청탁이나 뇌물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 수석의 말.
“김 대통령은 취임 후 정치 자금은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추석이라고 해도 떡값 아니라 찻값도 받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삼성자동차 허가 무렵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삼성그룹에 격한 감정을 나타냈습니다. 부산 시민들이 김 대통령을 찍어 대통령에 당선시켰는데 부산 경제를 살리겠다는 삼성에 자동차 사업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삼성이 배후에서 부산 시민을 선동해 나쁜 여론을 조성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면 “한 수석. 나쁜 사람들이야. 부산 시민을 선동했어. 대통령을 만들어 주었더니 부산 경제를 살려 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이야.”
한 수석은 이에 대해 “각하 그렇긴 합니다만 재벌이라면 그런 것 아닙니까. 부산 시민을 동원해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전략을 세우면 됩니다.”
“무슨 방법이 있는 기가?”
“각하, 삼성그룹이 돈 많이 버는 것 못마땅해 할 것 없습니다. 삼성이 돈 많이 벌어 IT사업할 것 아닙니까. 그 대신 내부에서 구조조정을 하면 자동차 사업을 허가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되겠나?”
“제가 이건희 회장을 만나 구조조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수석은 곧장 이 회장과 연락해 두 시간 후 서울 롯데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본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경제수석실로 내려오자 금방 김 대통령이 전화를 했다.
“어이 한 수석. 삼성에서 설탕, 구두표 한 장도 받으면 안 된다.”
“각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롯데호텔을 향해 집무실을 나서려는데 다시 김 대통령이 전화를 했다.
“한 수석. 절대 구두표 한 장이라도 받지 마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한 수석은 이 회장을 만나 5시간가량 극비 대화를 나눴다. 삼성이 구조조정을 하면 정부가 자동차 사업을 허가하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한 후 헤어졌다.
한 수석은 그후 1996년 4월 김 대통령의 배려로 부산 북·강서을 선거구에서 출마해 15대 국회의원이 됐다.
김 대통령은 한 수석에게 후임 경제수석을 추천해 보라고 말했다.
“한 수석 후임은 누가 좋겠노?”
“예. 이석채 재경원 차관이 가장 적임자입니다. 그 밖에 없습니다.”
“그래. 알았다.”
한 수석은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관에게 전화로 그런 사실을 은밀히 귀띔해 줬다. 두 사람은 친구이자 고시동기로 각별한 사이였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이 인사안은 뒤집어졌다.
경제수석으로 기용될 것이 확실하던 이석채 차관이 정통부 장관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장관은 정통부 장관을 거쳐 1996년 8월 장관급 경제수석으로 청와대에 입성한다. 그래서 인사는 최종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귀신도 모른다고 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