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IT CEO]황해령 루트로닉 사장(12월 지경부 장관상)

[글로벌 IT CEO]황해령 루트로닉 사장(12월 지경부 장관상)

 어릴 적부터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다섯 살 때 이미 잠수함을 만들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중학교 때는 집에 있는 시계·라디오를 분해하고 조립하다 부모님께 많이 혼나기도 했다. 발명가인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릴 적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어요. 정규교육을 받지 않으셨지만 항상 책을 놓지 않으셨죠. 87세 때 토인비의 책을 읽을 정도로 열정적이셨어요. 제가 대학생일 때 당신의 아이디어를 말씀하시곤 했죠. 지금도 내 인생의 ‘멘토’ 같은 분입니다.”

 아이는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원까지 마친 후 건장한 젊은이가 돼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뭔가 만들기를 좋아하던 청년은 전량 수입해서 사용하던 의료용 레이저기기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다. 황해령 루트로닉 사장(53)의 이야기다.

 황 사장이 귀국했을 1990년대 당시 병원들은 의료용 레이저기기를 전량 수입해서 사용했다. 미국 기업이 대부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기기 한 대당 수억원에 판매됐다.

 “아무도 국내에서 의료용 레이저기기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한국인의 손재주면 만들 수 있겠다 생각해서 무턱대고 달려들었죠.”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 레이저 의료기기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97년 회사를 창업한 후 전국에 있는 레이저 관련 기술자를 찾아다녔다. 미국 내 인맥도 총동원해 기술적 도움을 받았다.

 기술개발은 진척돼 갔지만 고민거리가 생겼다. 외환위기(IMF)를 맞으면서 자금을 댈 투자자를 구할 수 없었다. 황 사장은 가산을 털어 연구개발 자금을 조달했다. 할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2년의 연구개발 끝에 드디어 색소, 문신 치료용 레이저 기기를 출시했다. 외산 제품보다 30% 싼 가격에 내놓았지만 선뜻 구매하는 사람이 없었다. 의료기기는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의사들이 구매를 주저했다.

 그러나 황 사장은 천천히 고객들과 신뢰를 쌓았고, 그의 인품을 믿고 구매하는 의사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별 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입소문이 퍼졌다. 알음알음 지인들의 소개로 제품 판매가 늘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처음으로 대만에 수출도 시작했다. 대만 에이전트와 신뢰를 쌓은 후 의외로 일본 시장에 진출하게 된다.

 기존 미국 제품과 달리 레이저 출력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첨가하면서 루트로닉 제품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이 기능은 우연한 기회에 개발됐다. 실험 중 오류가 발생해 단일 파장의 레이저가 출력 유형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루트로닉은 실험 결과를 분석해 출력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을 개발했다.

 루트로닉 제품이 수출까지 되면서 2000년 중반에는 콧대 높은 국내 대학병원도 루트로닉 제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국내 대학병원 대부분이 루트로닉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루트로닉은 수출과 내수 비중이 50%씩 균형을 이루고 있다. 수출도 유럽·일본 등 선진국 시장 비중과 아시아 신흥시장 비중이 절반 정도다. 환상의 포트폴리오로 평가된다.

 지난해 아시아 미용 레이저 의료기기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했다. 상위 10개 기업 중 아시아 기업은 루트로닉이 유일하다.

 세계 의료용 레이저기기 시장은 40억~50억달러에 달한다. 루트로닉이 주력하고 있는 피부 레이저 시장만 해도 7억달러에 육박한다. 피부용 레이저기기 시장에서 루트로닉은 세계 시장 점유율 3%를 차지하며 9위에 올라 있다. 글로벌 기업과 비교하면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술력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 곳곳에서 실적을 내고 있다.

 “레이저 의료기기 시장은 기존 시장을 뺏어오는 개념보다는 블루오션을 창출하는 경향이 더 강합니다.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면 완전히 새로운 의료기기 시장이 창출되는 식이거든요.”

 황 사장은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창업 후 2년 동안 직원들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했지만 직원들과의 약속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했다.

 거래처와도 신뢰를 쌓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됐다. 회사가 어려울 때 거액의 계약금을 선뜻 내주는 업체도 있었고 부품 업체들은 외상으로 제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업은 물건을 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게 아니라, 거래를 통해 사람과 가치를 남기는 겁니다. 고객과 직원에게 철저하게 약속을 지킨 결과 해외 바이어들도 루트로닉을 믿을 만한 회사로 인정하고 있어요.”

 레이저 치료기를 포함한 의료기기도 신뢰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장이다. 레이저의 편차가 0.1%만 생겨도 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루트로닉은 피부과 의료기기 시장에서 기술력을 축적해왔다. 피부 및 성형 분야에서는 글로벌 톱 수준의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 루트로닉의 해외 고객 95%가 재구매하는 비율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는 다양한 치료기기 시장으로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레이저 기기는 각 파장에 따라 흉터·여드름·제모·주름살제거·얼굴성형 등 기능이 달라진다. 최근에는 황반변석(눈 뒤 신경세포에 영양공급이 안 돼 생기는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안과용 레이저기기 개발에 돌입했다. 안과용 레이저기기는 관련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레이저 파장이 조금만 어긋나도 자칫 실명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루트로닉은 세포 재생 레이저를 통해 황반변석 치료기를 개발할 계획이다. 2012년까지 임상실험용 제품을 선보인다는 방침이다.

 황 사장이 ‘신뢰’ 다음으로 강조하는 것이 ‘혁신’이다.

 “기술뿐만 아니라 생각도 혁신적이어야 합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혁신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는 루트로닉을 어떻게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시킬지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회사 내부의 기술력 및 제품의 글로벌화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조직문화, 조직 구조의 글로벌화에 집중하고 있다.

 “이미 국내 시장 영업만으로는 기업이 먹고살 수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모든 경영 역량은 세계 시장에 맞춰 집중해야죠.”

 기본적으로 루트로닉은 연구개발 회사를 지향한다. 기술이 필요하면 다른 업체와 협력하고, 인재가 필요하면 인재가 있는 곳에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의다. 이런 기조에 맞춰 올해 7월 샌프란시스코 프리몬트에 연구소를 개설해 5명의 미국인 연구원을 채용했다.

 혁신을 지향하며 인재에 대한 과감한 투자도 단행했다. 올해 7월에 글로벌 기업에서 연구총괄하던 담당자를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영입했다. 루트로닉의 연구 시스템을 글로벌화하기 위해서다. 중소기업 방식의 연구개발이 아닌 선진 기업의 연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앞선 기업의 연구개발 방식을 진행하면서 내부 인재를 양성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물고기는 자신이 물속에서 산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경영자는 자신의 틀을 깨고 모든 것을 뒤집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황해령 루트로닉 대표 약력>

 1982년미국 예일대학교 졸업(경제학)

 1991년미국 코네티컷 주립대학 경영대학원 수료 (마케팅)

 1988~1991년미국 레이저 시스템 부사장

 1991~1997년AK테크 대표이사

 1997년~현재루트로닉 대표이사

 

 <회사 현황>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

 설립연도 〃 1997년

 수출 개시 연도 〃 2001년

 종업원 수 〃 177명

 기업규모 〃 중소기업

 주 생산품 〃 레이저〃광학 의료기기

 주 수출품 〃 레이저〃광학 의료기기

 

 <회사 소개>

 루트로닉은 광학·레이저 의료 솔루션 전문기업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의료용 레이저를 개발해서 생산하고, 판매와 애프터서비스(AS)까지 제공하는 업체다.

 1990년대 중반 국내에서 생산되는 의료용 레이저 제품이 전무하던 시절,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던 황 사장은 ‘세계적인 수준을 갖춘 장비를 만들어 보자’는 목표를 내걸고 1997년 지금의 회사(당시엔 맥스엔지니어링)를 설립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1998년 2000만원에 불과하던 매출액은 지난해 370억원까지 증가했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매출 증가율은 무려 48.9%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