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온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마땅한 차기 회장을 찾지 못한 채 해를 넘길 상황이다.
지난 7월 조석래 현 회장(효성그룹 회장)이 건강상 이유로 사퇴 의사를 밝힌 후 전경련 측에서는 이건희 삼성 회장을 추대해 파워풀한 전경련 시대를 열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삼성 측에서 이 회장의 바쁜 일정 등을 이유로 계속 고사하고 있다. 전경련은 이 회장을 포함해 4대 그룹 총수 중에서 추대하려 하고 있지만 현대차그룹, LG그룹, SK그룹 등이 모두 이러저런 이유로 난색을 표하면서 회장직 공백은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회장직을 수행할 분을 찾기 위해 물밑에서 여러모로 접촉 중이지만 아직 회장직 수락 의사를 밝힌 분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26일 밝혔다. 조 회장의 임기가 내년 2월 말까지여서 빨리 후임자를 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경련은 다른 경제단체와 달리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 오너들의 모임이어서 상징성이 크고 외부에서 거는 기대도 많다. 이에 따라 4대 그룹 총수가 회장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삼성ㆍ현대차ㆍLG 총수는 60ㆍ70대로 경험이 풍부하고 SK 총수도 50대에 접어들었다. 문제는 4대 그룹 총수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회장직을 마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전경련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차기 회장은 이건희 회장이다. 이 회장이 재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확고한 데다 선친인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전경련 출범을 주도하며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인연도 깊기 때문이다. 또 이 회장이 회장직을 수락할 경우 재계 오너 1세대에 이어 2세가 전경련 수장을 맡는 흐름에 물꼬를 트는 일이어서 더욱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삼성 측이 강하게 고사하고 있다.
전경련 회장단은 조 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직후인 지난 7월 삼성의 영빈관 격인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서 모임을 열고 만장일치로 이건희 회장을 전경련 회장으로 공식 추대했다. 당시 정병철 전경련 부회장은 "(회장직 제의에 대해 이 회장이) `수락`이나 `거절`의 뜻을 표시하지 않은 채 미소로 답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은 지난달 18일에는 "(7월 승지원 만찬 때) 이건희 회장께 회장직 수락을 부탁드렸고 이에 3~5개월 정도 시간을 갖자고 말씀하셔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며 불씨를 살렸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당혹해 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3~5개월 정도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는 것은 전경련이 하는 얘기일 뿐"이라며 "7월 브리핑 때는 그런 말이 없더니 지금 와서 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반박했다. 이 회장도 일단 고사의 뜻을 내비쳤다. 그는 지난 9월 일본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전경련 회장직 수락 의사를 묻는 기자들 질문에 "일이 하도 많아서, 그리고 건강도 별로 안 좋고"라며 난색을 표한 바 있다. 이 회장은 지난 3월 경영에 복귀한 후 공격적으로 경영에 임하고 있으며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시간을 내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이 끝까지 고사할 경우 전경련에서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인사는 나머지 4대 그룹 총수들이다. 4대 그룹 선대 회장들이 이미 전경련을 이끈 바 있기 때문에 현 총수들이 나서면 모양새도 좋고 조직 위상도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제13~17대 회장(1977.4~1987.2)을 지내며 전경련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또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18대 회장(1987.2~1989.2)으로, 고 최종현 선경(현 SK그룹) 회장은 제21~23대 회장(1993.2~1998.8)으로 전경련을 부흥시켰다.
하지만 4대 그룹의 후대 회장들은 모두 회장직 수락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미 고사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또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999년 반도체 빅딜 이후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어서 회장직을 맡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50세로 아직 재계에서는 젊은 축에 속하며 최근 주력 계열사에 대해 세무조사가 진행되는 점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낮다.
4대 그룹 총수가 불발될 경우 관례에 따라 연장자 순으로 의견 타진이 이뤄질 전망이다.
현재 전경련 부회장단에서 4대 그룹 총수를 제외하고는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이 1938년생(72세)으로 가장 연장자다. 이어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1941년 생)과 박용현 두산그룹 회장(1943년 생)등 순이다. 그러나 이들이 재계 오너들을 강력히 이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렇게 되면 전경련 회장직을 놓고 10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보여 전경련 무용론까지 거론될 것으로 보인다.
[매일경제 김대영 기자/김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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