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대 모델로 진화하는 동안 그랜저의 위상은 많이 변했다. 최초의 그랜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좋은 자동차였지만 지금의 그랜저는 위로 에쿠스와 제네시스를 모신 프리미엄 세단의 막내 정도다. 하지만 그 품질력은 당당히 세계적인 모델들과 경쟁해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이 됐다.
올해 최고의 이슈메이커가 될 5세대 그랜저를 부산과 거제도 일원에서 시승했다. 주차장에 가득 도열해 있는 그랜저들을 태양광 아래서 처음 만났지만 마음이 어수선했다. 쏘나타처럼 화려한 칼질(?)로 빚어낸 디자인이 약간은 못 마땅해서다. 쏘나타와 에쿠스의 모습이 살짝 오버랩 된 듯한 디자인이지만 굳이 유전자를 따지자면 쏘나타에 더 가깝다.
비례 측면에서 그랜저는 잘 빠졌다. 휠베이스가 TG보다 65㎜ 늘어나, K7과 함께 동급 최대지만, 전장은 TG와 동일하게 유지해 동급에서 가장 짧다. 또한 폭은 가장 넓고, 키는 가장 낮다. 이는 실내 공간을 최대한 확대하면서 다이나믹한 스타일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실내는 외관보다는 덜 복잡하고 더 고급스럽다. 그래서 그랜저는 실내에 앉아 있을 때 더 고급차답게 느껴진다. 인테리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날개 형상의 센터 페시아로 화려하면서 조화롭다. 천정에는 대형 파노라마 루프가 달렸다. 휠베이스가 커진 만큼 공간에서도 그랜저다운 여유가 충분하다.
시승한 그랜저 HG300은 최고출력 270마력과 최대 토크 31.6㎏.m를 발휘하는 람다Ⅱ 3.0 GDI 엔진과 6단 자동 변속기가 어울려 연비 11.6㎞/ℓ를 실현했다. 수치 상으로 봤을 때 단연 동급 세계 최고 수준이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면 가장 먼저 뛰어난 정숙성에 놀란다.
반면 준대형 세단에 적용된 최신형 GDI 엔진은 강력한 달리기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높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270마력을 생각할 때 가속력이 기대에 못 미치고, 전반적으로 토크감이 부족하다. 긴 직선에서 엑셀을 끝까지 밟고 있으면 속도는 꾸준히 올라가지만 경쾌한 맛은 없다. 6단 변속기는 변속 충격이 없고, 상당히 매끄럽게 작동한다.
서스펜션 세팅, 흔히 말하는 승차감은 상당히 고급스럽다. TG의 출렁거림과는 차원이 다르다. 충분히 안락하면서 충격을 걸러주는 반응이 듬직하다. 럭셔리 세단으로서의 그랜저 본연의 성격에는 잘 맞다. 하지만 고속 주행 안정성은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남아있다.
가장 돋보이는 신기술인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ASCC)은 자동으로 앞차와의 차간 거리를 유지하며 정속 주행할 뿐 아니라, 교통 흐름에 따라 정지와 재출발까지 가능해 어떤 도로에서도 두 발이 모두 편안한 쉼을 누릴 수 있다.
5G 그랜저는 정말 잘 만든 차다. 국산차, 수입차를 막론하고 동급 경쟁모델 중에 가장 탁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판매 역시 현대차 측에서 기대하는 수준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랜저 구매 가능 고객들의 눈높이 역시 예전보다 훨씬 높아져, 비싸진 가격과 그랜저라는 명성에 거는 기대가 아주 높음을 고려해 본다면 그랜저가 과연 그 기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지는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랜저 1호차의 주인공이 된 현빈의 극중 대사를 인용하자면, “뉴 그랜저, 새로 선보인 이 모습이 최선입니까? 제가 보기에 최선은 아니군요.”
글·사진=박기돈기자 nodikar@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