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발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만큼 많은 논란과 분석의 대상이 된 미디어는 없었다.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된 메시지의 영향력은 활자나 음성을 통해 전달되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텔레비전이 올드 미디어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미디어로서의 영향력도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확산시킨 영상 이미지의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은 인터넷TV·스마트패드(태블릿PC) 등 다른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텔레비전이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미디어로 자리잡게 된 계기는 1926년 1월 27일 영국의 발명가 존 로지 베어즈가 영국 왕립 과학협회 50여명의 과학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텔레비전 공개시험을 성공하면서부터로 볼 수 있다.
존 로지 베어드 이전에도 독일의 과학자 폴 니프코브가 초창기 텔레비전의 이론적 원리를 제시하는 등 실제 세계를 영상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고민과 실험은 존재했다. 베어드는 독자적인 기술은 없었지만, 기존의 기술을 조합해 기계식 텔레비전으로 상업적 텔레비전 시대를 열었다. 존 로지 베어드가 선보인 텔레비전은 못 쓰는 가구에 24개의 구멍이 뚫린 닙코브 원판을 조립해 움직이는 영상을 구현한 형태였다. 베어드는 성공적인 공개 실험 이후 BTDC(Baird Television Development Company)를 설립해 1928년 런던과 뉴욕 간 최초 TV 중계까지 성공시키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듬해인 1929년 영국 BBC가 이를 활용해 시험방송을 시작하면서, 1935년까지 영국 전역에 약 4000대가 보급됐다.
하지만 상업적 텔레비전 시대를 연 베어드의 시대와 그가 고안한 기계식 텔레비전은 10년도 채 되지 못해 전자식 텔레비전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웨스팅하우스·RCA·벨전화회사 등과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막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전자식 텔레비전 개발에 나섰고, 개인 개발자에 불과한 베어드의 입지는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의 텔레비전을 가장 먼저 채택한 BBC방송도 1936년 정규방송을 시작하면서는 EMI와 마르코니사가 개발한 전자식 텔레비전을 채용했다.
이후 베어드는 소규모 극장에서 영화 상영이 가능한 고해상도TV(HDTV)와 컬러TV를 개발해 공개했지만, 2차 세계대전 중에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는 가난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베어드의 기계식 텔레비전도 결국은 런던 과학박물관의 유물이 됐지만 거기에서 인간의 직관과 감성이 개입하는 쿨 미디어의 역사는 시작됐다.
이수운기자 per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