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보이지 않는 목격자…DNA 지문

 최근 서울 영등포를 중심으로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저질러 온 이른바 ‘신길동 발바리’가 첫 범행 이후 2년여 만에 경찰에 덜미가 잡혔다.

 자칫 미제로 남을 뻔한 이번 사건을 해결한 일등공신은 DNA824 감식. 검거 당시 김 모씨(40)의 죄목은 성폭행이 아니라 절도죄였다. 김씨는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주택 4곳에 침입해 물건을 훔쳤으나 같은 해 11월 서울서부지법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경찰은 김씨의 수법이 신길동 발바리 사건과 유사하다고 판단해 그의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 의뢰했다. 이에 국과수는 최근 서울 서남부 일대에서 벌어진 8건의 성폭행·강도 사건의 용의자 DNA가 김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그를 붙잡았다.

 미국 CBS의 인기 드라마인 ‘CSI’처럼 DNA를 활용한 과학적 수사기법이 수사의 새로운 경향으로 떠오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목격자, DNA 지문(finger print)=DNA 수사는 세포물질로부터 DNA를 분리해 얻은 DNA 지문을 용의자의 대조시료와 비교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흔히 ‘인체의 청사진’으로 불리는 DNA는 인체 내 세포 핵 속에 존재해 인체 구성요소의 구조와 기능을 지배하는 유전부호를 보유하고 있다.

 쌍생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동일인으로부터 유래한 DNA는 그 유전자형이 신체 어느 부분에서 검출된 것이든 동일하고 오랜 시간이 경과해도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DNA를 활용한 수사는 칼, 담배꽁초, 휴지, 피 묻은 옷가지 등에서 발견한 혈흔, 정액, 타액, 소변, 모발, 치아, 뼈 등에서 유전자형을 얻어낸 뒤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유전자형을 비교해 유전자형이 일치되는 사람을 검거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구체적으로 전국 244개 경찰서에서 사건현장의 증거물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감식 의뢰한다. 국과수는 각종 생물학적 증거물을 바탕으로 혈흔, 인혈, 정액, 정자, 타액, 뇨, 혈액형 등의 항목으로 검사하는 시료별 예비실험 절차를 시작한다. 증거물로부터 DNA를 분리한 뒤 전기영동장치나 자동유전자형분석기를 활용해 유전자형을 판정한다.

 ◇물컵에서 DNA를 추출한다…진화하는 DNA수사=국내 DNA 수사기법은 단 시간에 질적인 면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를 성취했다. 과거에는 DNA를 단순 염색하는 기법으로 그 형태를 식별했으나 최근에는 유전자형 검출기를 활용해 보다 정확한 결과를 측정할 수 있다.

 국과수 관계자는 “2005년에 감식장비를 고도화한 이후 유전자형을 검출할 수 있는 최저점이 최소 10배에서 20배 이상 낮아진 상황”이라며 “그만큼 민감하게 측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DNA 타깃이 되는 생체량이 과거의 10% 수준에 불과한 경우에도 정확한 값을 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용의자가 마신 물컵에서도 DNA를 추출할 수 있다.

 이 관계자는 “예전에는 한 개의 머리카락에서 DNA 검출을 시도했을 때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대부분 성공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지문 수사보다 DNA 수사가 정확도도 높다. 가령 범인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 손잡이에 묻은 지문은 모양이 일그러져 용의자 식별이 쉽지 않지만 손잡이에서 검출되는 극소량의 DNA가 결정적인 증거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DNA를 추출한 생체물질은 초저온 상태에서 최장 100년까지 보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신길동 발바리 사건처럼 DNA 수사는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데도 한몫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7월부터 ‘유전자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유전자은행법)’을 시행했다. 법률에 따라 검찰과 경찰은 흉악범죄를 저지른 구속피의자나 형이 확정된 수형인의 유전자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할 수 있다.

 국과수 관계자는 “과거의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DNA형이라는 것을 미리 확보해 DB화한다. 이후 A라는 범인이 이 사건과 별개로 다른 범죄와 관련해 구속피의자가 됐을 때 DNA 조사를 해서 대조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국과수는 공식적으로 현재 보관 중인 DNA 데이터베이스(DB)의 양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자칫 현재 진행 중인 수사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권침해 논란도 있다. 지난 1987년 초 영국 남부 라이세스트쉬어에서 발생한 여고생 강간살인사건은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당시 경찰은 인근 마을 주민 중 16세 이상 30세 이하의 모든 남자에게 혈액 제공을 요구해 채취한 약 5500개의 DNA를 피해자에서 채취한 정액에서 나온 DNA와 대조해 범인 검거에 성공했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몰고 간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과수는 이 때문에 해결된 사건의 DNA DB는 즉시 파기해 이 같은 논란을 사전에 차단한다. DNA 감식이 인권보호에 앞장선 사례도 있다. 미국의 빈센트 젠킨스는 1982년 발생한 강간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돼 무려 20년형을 선고받았다. 17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던 와중, 지난 2000년 피해자의 몸에서 검출된 DNA가 젠킨스의 DNA와 다르다는 게 확인돼 무죄임이 최종 증명됐다.

 ◇침에서 추출한 DNA로 머리카락 색과 눈 색도 맞춘다?=DNA 수사는 최근 개인식별 기능에서 개인의 나이, 모발, 눈 등 특성을 해독하는 데까지 진화하고 있다.

 실제 미국에서는 DNA 감식을 통해 용의자가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인지 갈색 눈을 가진 동양인인지를 구분하는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과수 관계자는 “현재 DNA 감식은 개인식별 쪽에 맞춰져 있어 용의자를 특정하는 데 불편함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면서 “기술이 보다 발전하면 DNA에서 용의자의 특성을 파악해낼 수도 있다. 가령 DNA로 범인이 20대의 남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경찰이 용의자로 추정되는 이들의 범위를 보다 좁혀 효율적인 수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계획적인 강력범죄 현장에서 지문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미세한 혈흔, 심지어는 모근이 없는 모발이나 비듬이 남겨진 경우가 많아 DNA를 검출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범죄 검거율을 높이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보다 과감한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진욱기자 coolj@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