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랄프 네이더 지음. 강경미 옮김. 꾸리에 펴냄.
장래가 촉망되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평범한 엘리트였던 그가 사회 운동에 나선 계기는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절단한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바치기 위해 쓴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책은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거대 자동차 업체인 GM을 고발하면서 끝내 GM 사장의 공개 사과를 받아냈다. 공개 사과가 있기까지 GM은 그를 매장하기 위해 사설 탐정을 동원하는가 하면 온갖 회유와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젊은 양심이 만들어낸 한 권의 책이 결국 거대 기업을 굴복시킨 것이다. 책은 미국 승용차들의 성능과 구조적 결함을 지적한 정도였지만 “자동차 사고는 운전자의 잘못이지 차의 결함일 수 없다”는 고정 관념을 타파했다는 점에서 소비자 운동의 전환점이었다.
‘소비자 대통령’으로 칭송받는 랄프 네이더의 유명한 일화다. 그는 부시 대통령과 앨 고어 부통령이 대결한 지난 2000년 대선전에서 후보로 나서 3%의 득표를 올렸다. 네이더는 고어 후보의 표를 잠식함으로써 경합 지역의 판도를 바꿨다. 결국 고어 후보가 총득표 수에서 앞섰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네이더를 시민 운동의 대부로 추앙하는 것은 그가 다양한 사회 현안을 넘나들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 왔기 때문이다. 그는 IT 공룡인 마이크로소프트(MS)의 시장 독점 폐해에서도 칼날을 세웠다. 네이더는 “전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MS가 교활하고 강력한 방법으로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소비자 운동을 벌여 MS의 독주를 막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덕분인지 빌 게이츠 회장은 독점금지법 위반 혐의로 피소되기도 했다.
신간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는 팔순에 이른 네이더가 일생에서 못 다 이룬 꿈을 집대성한 책이다. 허구적 소설이지만, 실은 네이더가 믿고 있는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소설적 비전으로 담아냈다. 책은 17명의 억만장자들을 소개한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빌 게이츠, 폴 뉴먼, 테드 터너, 배리 딜러, 로스 페로, 버나드 라포포트, 맥스 팔레브스키, 오노 요코, 솔 프라이스, 피터 루이스, 필 도나휴, 제노 파울루치, 빌 코스비, 레너드 리지오, 조 자메일이 그들이다. 하나같이 ‘부자 세금 많이 내기 운동’을 펼치며 노블fp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자산가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꿈꾸는 미래는 많이 가진 자들로서 단순히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전면적인 사회 개혁을 실현하겠다며 함께 나선다. 시장 만능 자본주의와 기업 활동의 폐해가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한 주범이라 지목한다. 대기업이 장악한 금권정치를 깨뜨리고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하기 위한 사회 대전환 프로젝트를 주도한다. 스스로를 사회 개선론자로 부르며 절대 빈곤 해소와 시장 하부 경제를 위한 일에 적극 나선다. 현실에선 믿기 힘든, 노인네의 엉뚱한 상상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책을 읽어보면 달라진다. 미국 보험 업계를 상징하는 피터 루이스가 미 상원에서 증언하는 장면을 보면, 어떤 경제학자보다 탁월한 네이더의 냉철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2만7000원.
서한기자 h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