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맥스는 지난해 연간 매출로 1조원을 달성했다.
벤처로 창업한 지 21년만이다. 20년 전 설립한 벤처 1세대로 처음으로 ‘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다. 1989년 창업한 휴맥스(당시 건인시스템)는 변대규 사장이 서울대학교 제어계측공학 박사 졸업 후 후배 6명과 의기투합해 설립했다. 자본금 5000만원으로 손바닥만한 사무실에서 보잘것없이 시작했지만 지금은 세계 셋톱박스 시장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직원 6명의 작은 기업으로 출발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을 일궈낸 거의 유일한 기업이다. 새로운 벤처 역사를 썼다는 평가가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 벤처도 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휴맥스는 대부분의 벤처가 국내에 치중했던 것과 달리 일찌감치 세계시장을 겨냥했다. 지난 20~30년 동안 창업해 글로벌 무대에서 제대로 성공한 기업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이는 대목이다.
휴맥스는 1989년 창업해 1996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세계에서 3번째로 디지털 위성방송 수신용 셋톱박스 개발에 성공해 셋톱박스 시장 기술 선도업체로 발돋움했다. 2000년 유럽 일반 유통시장을 석권한 데 이어 중동에서도 대표 브랜드로 올라섰다. 이후 미국·일본·신흥 국가 등 전 세계 시장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창업 첫 해인 1989년 1억2500만원이었던 매출은 2008년 7819억원, 2009년 8027억원으로 가파르게 성장했으며 창업 20여년 만에 6000배가 넘는 진기록을 세웠다. 급기야 창업 21년 만인 2010년 벤처 1세대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그 사이 직원 수도 11명에서 713명으로 늘었다.
1997년 영국에 진출한 이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장해온 휴맥스는 중동(1999년), 독일〃미국(2000년), 일본(2001년), 인도(2003년), 이태리(2003년), 호주(2004년), 홍콩(2005년), 태국(2007년) 등 전 세계 15여개에 이르는 법인과 지사를 두고 있다. 폴란드·인도·중국 등 7개에 이르는 생산 거점을 확보했다. 휴맥스는 전체 매출 중 수출 비중이 95% 이상이다. 전체 임직원 중 절반 이상이 연구직일 정도로 기술개발에 힘써 왔다. 벤처로 출발한 휴맥스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IT 대기업’으로 새로운 기업 모델을 준비 중이다.
<표> 기업 개요
- 창업: 1989년
- 코스닥 상장: 1997년
- 사업 영역: 위성〃케이블〃지상파〃IPTV〃IP하이브리드 셋톱박스
- 글로벌 네트워크: 15개 해외 법인과 지사, 7개 생산거점
- 종업원수: 713명 (2010년 기준)
<휴맥스 성장 스토리>
◇‘포장마차 결의’, HP를 목표로=“1989년 친구들과 신림동에 있는 단골 포장마차로 기억합니다. 대학원 동기와 장래를 얘기하다가 다 같이 창업을 해보자고 장난처럼 의견을 모았지요. 사업 계획은 물론 없었습니다. 그것이 휴맥스 탄생의 출발이었습니다.”
변 사장은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대학원 동료와 소주를 마시면서 장래를 얘기하던 중 창업을 하자고 장난처럼 결정을 내렸다. 이를 변 사장은 ‘포장마차 결의’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1990년대 말 벤처 붐이 시작했고 이보다 10년이나 앞선 변 사장의 창업은 그야말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창업 자금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변 사장은 “기술신용보증기금에 5000만원 짜리 보증서를 신청하러 갔더니 창구 직원이 대뜸 집 등기부등본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숙생이라고 했더니 직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하숙생이 보증 받으러 온 것은 처음 본다며 황당해했던 경험이 새롭습니다”라고 말했다.
변 사장이 창업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지도교수였던 권욱현 교수의 영향이 컸다. 권 교수는 연구논문만을 중시하는 대학의 기존 가치관을 깨고, 벤처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우쳐 주었다. 당시 만해도 박사 학위를 받고 기업으로 간다면 말리던 시기였다. 권 교수는 스탠포드대학에 교환 교수로 있는 동안 학생들이 창업으로 실리콘밸리에 진출하는 것을 보고 “휴렛패커드(HP)와 같은 회사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했다. 변 사장은 결국 1989년 2월 제어정보시스템연구실(CISL)에 있던 동료 선후배 6명과 의기투합해 건인시스템을 창업했다.
◇수없는 시행착오 후 맛본 성공의 경험=휴맥스는 설립 초기 주로 정부·민간연구소·기업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회사를 운영했다. 창업 이후 5년 동안은 공장 자동화(FA)와 관련한 용역사업, 산업용 비전시스템, 비디오 신호처리보드 등 뚜렷한 사업 전략이나 목표 없이 닥치는 대로 사업을 운영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사업 안목도 없이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다가 1991년 내놓은 제품 하나가 PC용 영상처리보드였다. 그때 이 제품에 대해 광고하면서 맨 마지막에 ‘영상 위에 자막을 올릴 수 있다’는 문구를 넣었다.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기능이었는데 이를 무심코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객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고객 문의전화가 마지막 문구에 집중되는 것을 알고 ‘이것이 시장 이구나’고 판단했고 아예 이를 부각한 자막처리 보드인 ‘비디오믹스’를 다시 개발했다.
이 제품은 휴맥스가 시장과 사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존 회사가 만들고 싶은 것만 만들었지만 이 제품은 휴맥스가 처음으로 ‘시장이 원해서’ 개발한 제품이었다. 노래방 붐이 불면서 이 제품은 노래반주 영상에 가사를 띄우는 기술로 히트를 쳤다.
◇디지털 가전에서 셋톱박스로 전략 수립=휴맥스는 이어 1993~94년 무렵 ‘디지털 가전’을 사업 분야로 결정했다. 창업 후 처음으로 전략적으로 의미 있는 의사 결정이었다. 변 사장은 시장에 변화가 있을 때 휴맥스와 같은 기업에게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기술에 기반한 가전 산업이 결합할 때 큰 변화가 생긴다고 본 것이다. 디지털 가전이라는 말은 거창해 보이지만 당시 시장에서 수요가 있는 제품은 가정용 ‘가요 반주기’ 정도라고 판단했다. 브랜드를 휴맥스로 정하고 대기업에 납품하지 않고 직접 국내 유통을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 작은 시장이었지만 국내 대기업까지 진출한 이 시장에서 휴맥스는 시장 점유율 1위 업체로 올라섰다.
이 과정에서 1995년 초 모 대기업이 호주 방송국에서 디지털 위성 셋톱박스를 구매한다는 입찰 안내서를 가져와 개발 가능성을 타진해왔다. 휴맥스는 회사가 지향하는 디지털 가전 사업과 맞아 떨어진다고 판단해 셋톱박스와 첫 인연을 맺었다. 셋톱박스 사업을 시작하면서 휴맥스는 당시 진행하던 DVD플레이어 개발 등 기존의 모든 사업을 접고 모든 자원을 셋톱박스에 다 걸었다. 말 그대로 선택과 집중이었다.
하지만 셋톱박스 개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휴맥스는 디지털 회로 설계와 일반적인 소프트웨어 설계 능력은 있었지만 디지털방송 지식이 전무했다. 셋톱박스 납품을 위해 방송사 인증을 받는 과정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밤샘 작업을 수없이 반복했다. 개발 기한 1년을 훌쩍 넘겼고 1년 반 만인 1996년 9월 개발을 끝냈다.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 최초, 세계에서 3번째로 디지털 위성방송용 셋톱박스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IMF 부도 위기를 딛고 재도약=1996년 9월 개발과 동시에 1000만달러 수출이라는 쾌거를 올린 기쁨도 잠시 휴맥스는 큰 위기를 맞았다. 수출 목표 대상이었던 방송사가 갑자기 유럽 대형 방송사에 합병되면서 시장이 사라졌다. 게다가 이탈리아와 남아공에 수출했던 제품에서 심각한 품질 문제가 발생했다. 마케팅 네트워크도 현지 조직도 없는 소규모 기업이었던 휴맥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였다.
설상가상으로 ‘1997년 하반기에는 IMF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국내 거래업체가 부도가 났고, 이 여파로 휴맥스도 부도 직전까지 내몰렸다. 대내〃외적인 악재로 회사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휴맥스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97년 휴맥스는 영국 벨파스트에 현지법인을 세우고 유럽시장 개척에 적극 나섰다. 휴맥스 현지법인 설립은 휴맥스 성공의 핵심요인일 정도로 중요한 결정이었다. 직접 자신의 눈으로 직접 시장을 보고 고객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걸림돌도 있었다. 휴맥스는 국내에서는 기술 회사로 알려져 있었지만, 유럽 큰 기업과 비교하면 품질·가격·재무·마케팅 등 모든 분야에서 부족했다. 유럽 대형 방송사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한국의 중소업체와 거래를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대기업 중심에서 틈새시장인 ‘일반 유통시장’을 공략하기로 결정했고 이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당시 휴맥스는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자체 브랜드를 사용하자고 설득했고 100~200대 소량이라도 재고를 두고 공급했다. 자체 브랜드 결정은 다른 기업과 다른 전략이었다. 자체 브랜드를 통한 해외 사업은 많은 투자도 필요해 대부분 업체는 외주(OEM)사업이 일반적이었다.
휴맥스는 일반 유통시장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2000년 휴맥스는 필립스·노키아 등 쟁쟁한 글로벌 기업을 제치고 유럽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섰다. 중동에서도 빠르게 성장하면서 셋톱박스 대표적인 브랜드로 등극했다.
◇해외 거점 구축, 그리고 가파른 성장세=유럽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2000년 초, 휴맥스는 두 방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과거 실패한 경험이 있던 방송국 시장에 다시 진출하고 유럽 이외 지역으로 시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었다. 유통 바닥에서 휴맥스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방송국도 휴맥스라는 이름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방송사는 시장에서 휴맥스 제품을 구입해 기능이나 품질을 사전에 시험했다. 초기에 기술·품질·재무·마케팅 등 모든 측면에서 경쟁력이 없었던 휴맥스는 적어도 기술이나 품질 측면에서는 경쟁력을 갖춘 회사라는 평가를 얻었다. 2000년 중소형 방송국과 한두건 계약을 성사시킨 휴맥스는 2001~2002년에 걸쳐 전 세계 방송국으로 거래를 확장했다.
해외 네트워크도 빠르게 늘었다. 1999년 12월 중동에 이어 2000년 1월 독일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2001년 6월 미국, 11월 일본에 현지 법인을, 2002년 2월에는 영국 벨파스트에 공장과 함께 있던 마케팅 조직을 분리해 런던에 현지사무소를 설립하는 등 세계 주요거점에 현지 조직을 구축해 나갔다. 2002년에는 국내 위성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했으며 독일 대형 위성방송사에도 제품을 공급했다. 2005년에는 세계 최대 위성방송사 미국 ‘디렉TV’에 셋톱박스를 직공급하는 쾌거를 올리는 등 선진 시장에서 잇달아 승전고를 울렸다. 매출도 1997년 142억원에서 1998년 284억원, 1999년 541억원, 2000년 1426억원, 2001년 3151억원, 2005년 6182억원으로 성장했다.
◇성장통 이후 또 다른 도전의 시작=셋톱박스 사업을 시작한 지 10여년 간 50배가 넘게 성장한 휴맥스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대내외적 사업 환경은 녹록하지 않았다. 셋톱박스 산업이 고도 성장기를 지나 점차 시장 성숙기로 접어 들었다. 기술과 가격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내부에서도 조직 규모와 업무가 급속히 늘었지만 경영 시스템 전반의 변화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에 2006년에서 2008년 2~3년 간 매출은 7000억원 대에 머무르며 성장세가 주춤했고 전반적인 수익성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휴맥스는 정체를 겪으면서 이전과 다른 치열한 생존 경쟁 환경 속에서 새로운 ‘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방식과 기업 체질 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지난 200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개발, 마케팅, 품질, SCM 등 회사 전 분야에 걸쳐 혁신 활동을 추진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혁신 활동의 성공으로 휴맥스는 중견 규모 기업으로 내부 조직화와 기업 운영 측면에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 글로벌 사업 구조와 탄탄한 경영 시스템, 경영 역량은 새로운 성장을 견인할 주요한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 결과 창업 21년만인 2010년 벤처 1세대로 처음으로 매출 1조원 달성해 벤처 기업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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