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통신사업자 선정을 위한 마지막 관문(關門)은 3차 청문심사였다.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야 사업자 선정이란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96년 6월 3일.
청문심사장인 경기도 과천시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는 아침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보통신부는 외부인의 연구원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청문심사장에 들어가는 신규통신사업 신청법인의 ‘얼굴’인 컨소시엄 대표조차 일일이 신분을 확인한 후 안으로 들여보냈다.
첫날 청문심사는 오후 2시 30분 시작했다. 청문대상인 TRS분야 컨소시엄 대표와 보조자들은 오후 2시 전에 청문회장에 들어와 자리를 지켰다.
최종 심사를 앞둔 이들의 표정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사업자 선정의 당락(當落)을 결정할 마지막 면접심사여서 이들의 얼굴은 납덩어리처럼 굳어 있었다.
청문심사장은 연구원 2층 중회의실에 마련했다.
정통부는 청문위원들과 업체 대표단, 보조자들이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좌석을 배치했다. 이성해 정통부 정보통신지원국장(정통부 기획관리실장, KT인포텍 사장 역임, 현 큐앤에드 회장)과 이규태 통신기획과장(정통부 감사관, 서울체신청장 역임, 현 한국IT비즈니스진흥협회 부회장)을 비롯한 정통부 지원팀과 속기사, 촬영팀 등이 양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날 오후 2시 30분.
“지금부터 신규통신사업자 선정을 위한 청문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을 깨고 위원장인 이석채 정통부 장관(현 KT 회장)을 대신한 이계철 정통부 차관(한국통신 사장 역임)이 청문심사 시작을 선언했다.
청문심사는 사업계획서 심사 때와 마찬가지로 비공개로 진행했다. 심사장 출입도 외부인은 금지했다.
심사위원은 청문항목 분야 전문가 5명과 사업계획서 심사위원 중 경영과 기술분야 각 1명씩 모두 7명으로 구성했다. 심사위원 구성은 5+2형식이었다. 심사위원장은 정통부 장관이 맡되 평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정통부는 극비리에 청문심사위원을 선정해 6월 2일 늦게 이석채 장관 등이 이들에게 직접 통보했다고 한다.
박한규 연세대 교수(한국통신학회장 역임, 현 연세대 명예교수)의 말.
“2일 밤 11시가 지난 늦은 시간에 이계철 차관한테 직접 연락을 받았습니다. 3일 아침에 이 장관과 조찬간담회가 있으니 참석해 달라고 하더군요. 이튿날 조찬에 약속시간보다 다소 늦게 참석했어요. 청문심사에서는 주로 기술분야를 질문했습니다.”
정통부는 6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간 청문심사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하루를 단축해 심사일정을 이틀로 조정했다.
청문심사 대상은 PCS와 TRS 전국사업자 등 2개 분야 3개군이었다.
첫날인 3일에는 TRS 전국사업자를 대상으로 청문심사를 진행했다. 4일에는 오전과 오후에 걸쳐 PCS 통신장비제조업군과 PCS 통신장비 비제조업군의 신청기업들의 청문심사를 실시했다. 신청기업들의 답변시간은 항목당 5분으로 제한했다.
심사위원들은 통신사업 참여타당성과 중소기업육성 및 지원계획, 기술개발계획. 통신망 구성계획, 인력양성계획, 소프트웨어 등 관련사업 육성 등 사전에 준비한 5개 항목에 대해 질문했다. 주 면접관이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해 답을 하면 전체위원들이 토론해서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첫날 오후에 청문회를 연 것은 그날이 9회 정보 문화의 달 기념식 및 제8회 정보문화상 시상식이 오전 11시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기념식에는 이수성 국무총리(현 통일을 위한 복지기금재단 이사장), 이석채 정통부 장관 등 정보통신 학계 및 업계 인사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TRS전국사업사 청문심사에는 기아텔레콤과 동부텔레콤, 아남텔레콤, 한진글로콤 4개 컨소시엄 대표와 보조자 1명씩 모두 8명이 참석했다.
심사위원은 양승택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정통부 장관, 동명대 총장 역임, 현 KAIST 초빙석좌교수), 방석현 통신개발연구원장(현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 박한규 교수, 김용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현 법무법인 화우 고문), 김광식 중소기업청 산업1국장, 전영섭 서울대 교수(경제학), 박항구 전자통신연구소 이동통신개발단장(현 소암시스템 회장) 등 7명이었다.
기아텔레콤에서는 남기재 대표(기아정보시스템 대표 역임, 현 태흥아이에스 부회장)와 이성신 이사, 동부텔레콤에서는 윤대근 대표(현 동부건설 부회장)와 윤석중 상무, 아남텔레콤은 김주채 대표(현 아남인스트루먼트 회장)와 이문규 이사, 한진글로콤은 고충삼 대표(대한항공 고문 역임)와 정요성 상무가 참석했다. 이들은 각자 기술력과 영업계획서를 바탕으로 자사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윤대근 동부텔레콤 대표는 기자들에게 “기술제휴처인 에릭슨이 컨소시엄에 지분 참여를 하지 않아 기술종속 우려가 없다”고 말했다.
첫날 청문심사는 시작 3시간여만인 오후 5시가 조금 지나 끝났다.
이튿날 6월 4일.
정통부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가장 경쟁이 치열한 PCS분야 신청법인인 에버넷과 LG텔레콤의 청문을 진행했다. 빅3 간 자존심을 건 마지막 승부처였다. 재계 1, 2위 간 컨소시엄인 에버넷과 LG텔레콤의 경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뉴스거리였다.
심사위원은 양승택 소장, 방석현 원장, 박한규 교수, 김광식 중기청 산업1국장, 김용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 이천표 서울대 교수(통신개발연구원장 역임, 현 서울대 명예교수, 산은 사외이사), 김재균 KAIST 교수(현 KAIST 명예교수) 등 7명이 담당했다.
남궁석 에버넷 대표(정통부 장관, 16대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역임, 작고)와 정장호 LG텔레콤 대표((LG텔레콤 사장, 부회장,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장 역임, 현 마루홀딩스 회장)는 같은 대학동문에다 친구 사이였다.
정 대표는 9시 15분경 통신개발연구원에 도착했고 남궁 대표는 9시 20분경 그 뒤를 이어 청문회장으로 올라갔다.
남궁 대표는 현대 측 홍성원 박사(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 KAIST 서울분원장,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회장 역임)과 같이 청문심사에 참석했다. 정 대표는 기술사인 안병욱 LG정보통신 이사(LG텔레콤 부사장, 데이콤 부사장 역임)와 동행했다.
오후 2시부터는 비제조업체군의 청문심사가 시작했다.
한솔PCS의 정용문 대표(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대표, 한솔PCS 사장 역임), 박재하 글로텔 대표(청와대 국방비서관, 모토로라코리아 사장·부회장 역임, 현 고문,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성기중 그린텔 대표(한국소프트텔니스 사장·부회장 역임) 등이 1시를 조금 지나 차례로 도착해 청문심사장으로 들어갔다. 정 대표는 민경수 한솔정보통신사업단 이사를, 박 대표는 오효원 효성텔레콤 부사장을, 성 대표는 최종호 한국정보통신 이사(그린텔 이사)를 보조자로 대동했다.
박재하 글로텔 대표의 기억.
“청문심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20여분 만에 끝났어요. 프레젠테이션(PT)까지 준비를 해 갔는데 별 질문을 하지 않아 아쉽더군요. 내색은 못했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성기중 그린텔 대표의 증언.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지는 않아요. 30여분 걸렸어요. 주로 기술력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공정거래위는 청문심사위원들에게 도덕성 평가와 관련해 각 기업의 위반자료를 제공했다. A4 용지 기준으로 삼성이 4장이었고 현대는 2장, LG는 1장이었다고 한다.
뒷날 PCS 사업선정과 관련해 의혹이 제기된 이른바 ‘전무(全無)배점 방식’이 등장한 것은 청문심사 첫날인 6월 3일 아침이었다.
심사위원들은 3일 아침 광화문우체국 직원식당에서 열리는 장관과의 조찬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 장관은 “한국의 정보통신산업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사안인 만큼 공정한 심사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어 “서류심사 결과 점수 차이가 미미해 변별력에 문제가 있다. 비등한 점수차로 당락이 갈려 시비가 일지 않도록 ‘전무(All or Nothing)방식’을 채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무배점 방식’이란 평가항목마다 해당 신청업체의 득점을 ‘0점 아니면 백점’식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각 항목의 가중치를 곱한 뒤 이를 합산하는 방식이다.
심사위원인 A씨의 증언.
“사전에 전혀 그런 내용을 몰랐어요. 그 자리에서 처음 이 장관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다소 당황하기는 했지만 심사위원들의 이의제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관은 이전부터 나름대로 이 방식을 숙고했다.
정통부 고위관계자 B씨의 증언.
“어느 날 이 장관이 느닷없이 사무실로 내려왔어요. 그리고는 ‘신규통신 사업자를 재벌 1, 2위에 주는 게 경제력 집중이나 중소기업육성 차원에서 타당한지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내 의견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지요. 그 후 ‘전무배점 방식’이란 것을 이 장관이 말했더군요.”
이 방식은 훗날 사업자 선정 이후 특정업체를 봐주기 위한 이른바 특혜의혹 시비의 도화선이 됐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PCS사업 선정과정은 정권차원의 비리로 등장해 정통부를 발칵 뒤흔들어 놓았다. 에버넷과 LG 간의 팽팽한 접전에서 LG가 미미한 열세를 뒤엎고 역전승을 거둔 것이 ‘전무배점 방식’을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정통부의 그 누구도 나중에 ‘전무배점 방식’이 특혜의혹의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