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으로 난 창을 열면 적상산 서쪽 벽이 보였다. 가을날 노을 지면 그 산이 왜 ‘적상(赤裳)’인지…, 늘 잊히지 않았다.
친구 셋과 함께 전라북도 무주군 ‘붉은 치마(적상)’에 올랐다. 제대한 지 한 달쯤 지난 1991년 9월이었다. 적상산성의 서창(西倉)이 있었다던 쪽에서 오른 뒤 북창(北倉)마을로 내려가 야영할 요량으로 정상을 넘어서는데…, 휑뎅그렁했다.
사방이 절벽이되 정상 부근은 흙으로 덮여 숲이 울창하고 물이 많기로 유명한 ‘적상’은 온데간데없이 굴착기 소리만 쿵쾅댔다. 무주양수발전소! 밤에 남아도는 전기로 아래쪽 물을 위로 퍼 올려 발전을 한다는 양수발전소의 위쪽 호수를 만들고 있던 것. 그때 그렇게 ‘적상’을 비롯한 덕유산국립공원의 녹지자연도(Degree of Green Naturality) 9등급 이상 산림과 습지생태계 10만평이 양수발전소 때문에 크게 흔들렸다. 환경영향평가 과정에서 녹지자연도 9등급이 8등급으로 조작돼 절대 보존할 지역이 훼손(235쪽)되기도 했다.
어디 무주뿐인가. 청평, 삼랑진, 산청, 양양, 청송의 자연이 양수발전소 때문에…, 시름했다.
한국 자연에 양수발전소를 부른 것은 ‘남는 전력’이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들어 심야에 전기를 싸게 쓸 수 있게 한 소비촉진책과 함께 양수발전까지 할 만큼 전력이 남아돌았다. 전력이 넘쳐난 것은 원자력발전소 때문. 1970년대에 착공한 고리 1·2·3·4호기와 월성 1호기가 잇따라 상업운전을 시작하자 “수요가 없어 전력이 남아돌고, 결국 원전을 가동하지 못해 막대한 매몰비용이 발생(252쪽)”했다. 투자한 돈을 회수할 겨를도 없이 전력이 그냥 샜다.
그래서 정부와 한국전력은 인위적으로 수요를 끌어올렸다. 전기료 인하가 잇따랐고, 1985년에 등장한 ‘심야전력제도’까지 더해지자 전력 수요가 크게 늘었다. 폭증한 수요는 1990년대 들어 ‘전력 부족 현상’을 불렀다. “전력 부족은 다시 원전 건설의 명분(253쪽)”이 됐다. 악순환! 한번 가동한 원전은 전기 생산량을 줄이거나 잠깐 멈출 수 없었다. 건설 기간도 10년을 넘기는 경우가 많아 계절과 시간에 따른 전력 수요에 무뎠다. 모르쇠로 발전을 해 알아서 쓰라는 격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예천양수발전소를 새로 짓기로 하는 등 좋지 않은 선택을 되풀이했다.
이제 달리 생각할 때다. 밤에 남는 전력을 이용하자는 양수발전소의 평균 가동률이 ‘4%’인 것만 해도 실패한 정책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잉여 전력을 소비하려고 추진한 심야전력제도와 충돌하면서 경제성이 더욱 떨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계획에 따라 한국전력이 발전소를 매각할 때의 걸림돌이 될 만큼 내부적으로도 문제(310쪽)”가 있다. 그런데 왜, 양수발전 건설계획이 계속 수립되는 것인가.
이쯤에서 묻자. 당신은 ‘전기세’를 내는가. 아니면, 전기요금? 진상현 경북대 교수(행정학)는 “일반 시민은 전기 사용에 있어 소비자가 아닌 피동적인 납세자로 전락한 상태(300쪽)”라고 썼다. ‘전기세’가 아니라 ‘전기요금’이라고 부르며 한국 원자력 정책을 살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이 책에 담겼다.
투박하되 무겁다. 책에 담긴 여러 사실이 무거워서다. 더구나 일본 후쿠시마 원전이 재앙을 부른 바에야!
진상현 등 지음. 도요새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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