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택의 지난해 매출액은 2조775억원, 영업이익은 839억원을 기록했다. 4년 전 워크아웃에 들어간 이후 다시 일어선 ‘오뚝이 경영’의 성적표다.
팬택은 90년 이후 창업한 국내 기업 중 매출액 2조원을 넘는 유일한 제조기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지난 1991년 설립 이후 수 많은 영광과 상처를 모두 안고 버텨온 뚝심의 결과물이다.
올해로 20살 청년이 된 이 기업의 지나온 세월은 ‘도전’이라는 단어로 함축된다. 모험에 가까운 도전 탓에 달콤함과 쓴맛을 모두 맛봤다.
창업 후 15년간 연평균 56%의 성장세를 유지하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 경쟁업체를 잇따라 인수하면서 몸집도 키웠다. 글로벌 휴대폰 7위까지 올라서면서 해외 시장에서도 인정받았다. 2005년 매출 3조원을 넘어서면서 ‘신화’가 완성되는 듯 했다.
그러나 휴대폰 시장이 침체된 2006년부터 모든 상황이 뒤집어졌다. 유동성 위기는 결국 2007년 기업개선작업으로 이어졌다. 위기를 새로운 도전으로 맞선 끝에 올해부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쓴맛의 여운이 남아 있지만 성공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도전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삐삐 창업, 거침없는 성장=팬택의 첫 출발은 ‘삐삐’로 시작됐다. 지난 1991년 당시 맥슨전자에 근무했던 현 박병엽 부회장이 집을 팔아 마련한 4000만원으로 창업을 했다. 당시 직원 수는 6명. 주 사업 아이템은 급성장을 확신한 ‘페이저(무선호출기)’로 잡았다. ‘도전’을 문패로 내건 전형적인 ‘벤처 창업’이었다.
1987년 당시 페이저 가입자는 6만명에 불과했으나 이후 빠르게 성장세를 보였다. 맥슨전자에서 페이저 업무를 맡았던 박 부회장은 페이저 사업 전담 조직을 구성하고 팀장에 올랐다.
이때 영업전략을 수립하면서 시장성을 내다봤다. 살던 집을 내놓으면서까지 무리한 창업에 나선 것도 바로 ‘확신’ 때문이었다. 맥슨전자에서 팀장 역할을 수행하며 습득한 관리 경험이 큰 힘을 발휘했다. 창립멤버와 머리를 맞댄 끝에 첫 작품인 ‘문자 페이저’를 선보였다.
창업 이듬해부터 외국 회사 제품들이 판치던 국내 페이저 시장에 한자와 영문, 한글 페이저를 잇달아 출시하면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디스플레이 방식이나 문자 페이저, 보이스 페이저, 광역 페이저 등 경쟁업체보다 6개월 빠른 신기능 제품을 선보이는 ‘6개월 컨셉트’를 적용하는 등 경쟁사와의 차별화에 초점을 맞췄다.
이 컨셉트는 성공을 불러왔다. 국내는 물론 동남아 시장에서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가파른 성장으로 이어졌다. 창업 이듬해인 1992년 매출 28억원에서 93년 98억원, 94년 289억원으로 뛰어올랐다.
◇새로운 선택 ‘휴대폰’=페이저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팬택은 1994년부터 변신에 나섰다. 당시 경쟁업체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면서 국내 페이저 시장이 포화상태에 다다른 것. 미래 수익 창출을 위해 주력 사업을 결정해야하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팬택은 신수종 사업 찾기에 나섰다. 우선 연구 인력을 60명을 늘리고 페이저와 같은 이동통신 범주에 들어가는 모든 제품에 대한 개발을 검토했다. 그 결과 휴대폰을 비롯해 무선전화기, CB트랜시버, 산업용 무전기 등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역점을 둔 것은 휴대폰이다. 휴대폰을 개발하기 위해 일본에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첫 제품은 일본에서 채택한 PHS 방식 단말기였다. 이 방식은 GSM이나 CDMA와 달리 로열티 부담이 없고 PCS나 GSM 단말기 기술도 함께 축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판단도 적중했다. 이후 이 개발 노하우를 바탕으로 GSM 기술을 개발, 중국 시장까지 이어졌다. 페이저·PHS 단말기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CDMA 휴대폰 단말기 시장도 진출하면서 LG정보통신의 ‘싸이언’을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납품했다.
◇모토로라에 ‘스타텍’ 납품=1998년 5월, 팬택은 잊지 못할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글로벌 2위 휴대폰 업체인 모토로라와 전략적 제휴를 맺은 것이다. 모토로라는 변방의 작은 휴대폰 생산업체에 불과했던 팬택의 주식 20%를 받는 대가로 1500만달러를 투자하는 한편 별도로 매년 연구개발비 300만달러를 투자키로 했다. 또, 팬택이 모토로라만을 위해 CDMA 단말기를 개발 생산하고 그 단말기들은 전량 모토로라 상표로 판매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팬택은 단번에 연간 3억달러 규모의 단말기 수출길을 보장받은 것이다. 반면, 자체 상표의 CDMA 단말기 판매를 포기하는 아픔도 맞봐야했다.
팬택이 고유 상표를 포기하고 제조업체로 전락하면서까지 다국적 기업인 모토롤라와 손을 잡은 데에는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한 기반 마련이라는 전략이 깔려 있다.
당시 모토로라는 팬택 인수를 목표로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부회장은 회사를 매각할 경우, 상당한 거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박 부회장은 개인 주식을 매각하는 방법이 아닌 신주를 발행해 모토로라에 매각했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회사를 더 크게 발전시키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토로라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투자에 앞서 8명의 기술실사팀이 3차례에 걸쳐 팬택의 연구실을 훑고 다녔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별다른 단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모토로라에 못지않은 기술관리 능력을 갖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재무구조에서도 건전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계약이 성사된 이후 팬택은 모토로라에 고급기종인 ‘스타텍’을 납품해 휴대폰 시장에서 ‘폴더형’ 돌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OEM 관계에서 상품기획과 자재 소싱, 제품 개발과 생산을 팬택이 주도적으로 담당하는 ODM 관계로 확대됐다.
◇큐리텔 합병에 이은 내수 도전=2001년 11월은 또 다른 결단이 필요했던 시기다. 하이닉스에서 분사한 단말기 제조업체인 현대큐리텔의 인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현대큐리텔은 ‘네오미’라는 휴대폰 브랜드로 인지도가 높았다. 그러나 2001년 당시 지속적인 시장점유율 하락과 하이닉스로부터 분사한 이후 연구인력 유출, 국내외 공급망 와해 등으로 생존자체가 불투명한 큐리텔를 인수하기까지는 여러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서의 만류도 난관 중에 하나다.
팬택의 도전 정신이 다시 가동됐다. 큐리텔 인수는 다시 한번 성장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팬택이 큐리텔을 합병한 후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인화’다. 박 부회장 특유의 친화력이 발휘됐다. 1000여명에 달하는 큐리텔 임직원을 팀별로 모두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로 마음을 이끌어낸 사례는 이후에도 계속 회자됐던 유명한 일화다.
인수 후 팬택과의 시너지에 역점을 뒀으며 점차 성과를 나타냈다. 큐리텔은 지난 2002년 미국 오리오박스로부터 휴대폰 500만대를 수주하는 초대형 수출건을 성사시켰다. 당시 국내기업의 휴대폰 수출 규모 중에서 가장 큰 약 7억3000만달러(약 1조원)에 달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수출 중심에서 내수 시장까지 영역을 넓혔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내수 시장 공략은 녹록치 않은 결정이었다. CDMA 단말기의 세계적 기술력을 갖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버티고 있어 노키아와 모토로라 등도 맥을 못추고 있는 실정이었다.
결정적으로 ‘승부 근성’이 발휘됐다. 수출을 통해 축적한 기술과 제품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을 믿었다. 1년 여간 국내 기술과 소비자 추이에 대한 조사와 검증 작업에 공을 들인 결과, 내수시장 진출 전략이 완성됐다.
내수용 신제품을 출시한 이후 거둔 성과는 놀라웠다. 당시 팬택앤큐리텔의 이름으로 제품을 내놓은 지 한 달 만에 모토로라를 제치고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뒤를 쫓아 시장 점유율 3위를 기록했다. 전국 규모의 AS망 구축과 최고의 품질을 적정한 가격에 공급하겠다는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15년 만에 찾아온 시련=3년 후인 2005년 팬택은 다시 SK텔레텍을 인수하면서 외형적인 성장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때 매출이 3조원을 돌파했다.
내실도 다졌다. 전체 구성원의 55% 이상이 연구개발 인력 중심이었으며 국내외 특허만도 3000여건에 달한다. 자신감이 넘쳤던 팬택은 전 세계 50여 개국에 제품을 출시하면서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승승장구의 시절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위기는 도둑처럼 찾아왔다. 2005년 모토로라가 글로벌 히트작 ‘레이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바꿔놨다.
레이저는 전 세계적으로 5000만대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으나 팬택을 포함한 여러 휴대폰 제조사들에게는 판매 부진이라는 아픔을 줬다. 판매 부진은 재고 부담으로 이어졌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마케팅 비용 증가에 따른 단기 유동성 위기까지 이어졌다.
기업 생존까지 위협을 받았다. 최고의 시련이 닥친 것이다. 이때 팬택의 선택은 ‘진정성’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생에 매진하겠다는 ‘마음’을 보여줬다.
박 부회장은 제1금융권에 호소해 채권행사를 3개월간 유예받았다. 이어 제2금융권과 개인들까지 포함해 전국 수 천명에 달하는 채권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설득 작업에 매진했다. 박 부회장은 설명회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았고 하루 한차례씩 링거를 맞으면서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났다.
진심은 채권단을 움직였다. 99.96%의 동의서를 받아낸 끝에 2007년 4월 19일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갔다. 팬택의 기업개선작업 개시 결정은 지난 2005년 12월말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이 만료된 이후 자율적으로 채권금융기관의 결의에 따라 기업 회생을 도모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특히, 서민 금융기관인 87개 단위 신용협동조합과 288개 새마을금고, 개인단체 등 제2금융권 전체가 채무조정안에 동의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팬택은 채권단에서 마련한 경영정상화계획 이행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교환하고 감자 결의에 이은 출자전환 확정으로 올해 12월까지 채권행사가 유예됐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기업개선작업 돌입 이후 팬택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박병엽 식’ 경영방식을 도입했다. 외부 환경 변화에 대비해 앞서 준비하고 대응하는 ‘시나리오 경영’을 시작했다. 또, 효율과 효과,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스템 경영’을 실시, 내부 역량 집중에 나섰다.
기업개선작업으로 고통을 받는 임직원들에게는 개개인의 노력과 집념, 열의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공유 경영’으로 치유해나갔다.
노력은 결과로 나타났다. 워크아웃 돌입 이후 지난해까지 총 14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열풍이 불어 닥친 지난해부터 스마트폰 개발에 매진하면서 회생의 기반을 마련했다.
지난해 팬택은 국내 시장에서 안드로이드 운용체계(OS) 기반 스마트폰 7개 모델을 출시한 끝에 국내 스마트폰 시장에서 2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지난해 스마트폰 부분의 누적 판매량은 98만대로 국내 업체 중에는 두 번째로 많은 판매량이며 외산 업체를 포함해도 애플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수치다.
해외 시장에서의 재도약도 맛봤다. 북미와 일본 등 전략 시장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나타냈다. 수출 물량은 2007년 500만대에서 올해에는 850만대를 예상하고 있다.
지난해까지가 스마트폰의 입문 시기라면 올해는 본격 확산에 접어든다. 올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20종 이상 포함해 총 35종 내외의 신제품을 출시하며 총 1800만대 이상을 국내외에 판매할 계획이다.
다양한 모바일에 기초한 기기를 공급하는 ‘IMD(Intelligent Mobile Device)’ 회사로 탈바꿈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 2013년까지 2500만대를 판매하고 매출 5조원의 고부가가치 회사로 거듭난다는 중장기 목표를 세웠다.
창립 20주년을 맞이한 팬택은 올해 말로 예정된 워크아웃 졸업을 성공적으로 달성, 팬택의 영광을 다시 찾겠다는 각오다. 새로운 ‘도전’의 역사는 이제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서동규기자 dk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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