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IT CEO]인터뷰-이성재 알에프윈도우 회장

[글로벌 IT CEO]인터뷰-이성재 알에프윈도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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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50 넘어서 벤처기업 창업해서 키우고, 개인적으로는 여한이 없다. 죽을 때 아름다운 추억만 기억날 것 같다.”

 누구나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길 꿈꾼다. 참 행운아다.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성공도 했다. “마음이 부자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발자취를 남겨 왔을까.

 이성재 알에프윈도우 회장(56)은 “대학졸업장·성적증명서·학위를 가지고 취업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스펙’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라면 쉽게 하기 힘든 말이다. 그는 “시대·사람·운 삼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졌다”고 말했다.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자마자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되면서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공무원이었다. 국내 통신사가 민영화되기 한참 전의 일이다. 체신부에서 기계식 교환기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가족을 부양하려고 시작한 일이 통신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됐다.

 1979년 우리나라는 벨기에와 미국에서 전자교환기를 도입했다. 통신 분야에 전자시대가 열렸다. 이 회장은 결혼도 하고 직장에도 다니고 있었지만 신문물에 적응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8년 만이었다. 대학·대학원을 거치고 박사과정까지 마치는 동안에도 일을 계속했다. 이 회장은 “주경야독하느라 고생스러운 나날이었지만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해 학생장도 맡았고 직장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전자식교환기를 접하게 된 게 ‘행운’을 얻은 셈이다.

 1981년, 그 와중에 체신부의 통신 부문은 한국통신공사로 분리됐다. 이 회장도 공무원에서 공사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전자식교환기가 도입된 뒤 정부는 ‘정보통신’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전자식 통신 개발 사업을 시작한다. 전전자교환기 국산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디지털유선교환기(TDX)’ 사업이다. TDX 사업은 향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 통신 표준을 국내에 정착시키는 교량 역할을 했다. 이때 서정욱 피코캐스트포럼 의장(전 과학기술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됐다. 서정욱 사업단장을 도와 일을 했다. 이 인연은 30년 넘게 이어져 피코캐스트 포럼을 발족시키는 힘이 됐다. ‘사람’을 얻었다.

 1991년 이 회장은 또 다시 신변에 변화를 겪는다. 한국이동통신(KMT·현 SK텔레콤)으로 이직했다. “TDX10까지 개발하고 대용량 교환기까지 개발한 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통신은 무선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는 회사를 옮긴다.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정부는 지난 1993년 9월 KMT에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을 발족시키고 CDMA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여기에서 일명 ‘삐삐’로 불리던 무선호출기(페이저) 시스템 상용화 사업을 맡게 됐다. TDX 교환기술에 무선호출 기술을 접목한 ‘TDX-페이징시스템(PS)’을 만들었다. 이 회장은 “지금은 삐삐를 만든 게 뭐가 자랑스럽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삐삐 보급률이 인구 100명당 35명까지 올라간 걸 생각하면 대단한 성과”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이 삐삐 보급률 2위였는데, 18%였다. 우리나라에서 삐삐가 히트를 치고 무선통신 시장의 개화를 앞당길 수 있었던 건 삐삐에 음성사서함을 녹음하는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계와 교신하는 걸 거북해해서 그 때까지 전화 자동응답시스템에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끊어버리곤 했다”며 “삐삐에 음성사서함을 도입하면서 기계에 대고 말하는 문화까지도 보급한 셈”이라고 말했다. 이는 ARS의 활성화를 이끌었다.

 그 다음 단계는 휴대폰 환경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삼성·LG·현대그룹을 이끌고 CDMA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96년 1월 1일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CDMA를 상용화하는 역사를 이뤄냈다”며 회상에 잠겼다. “시대를 잘 타고난 덕분에 우리나라 통신 발전사에서 내 손을 안 거친 작품이 없다”며 “통신 시장 개화기에 통신사에서 일을 할 수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시대·사람·운이 그에게 찾아왔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말을 믿는다는 그의 말에 비춰보면 밤낮을 잊고 기술 개발에 매진해 온 노력이 없었다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회장은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가난하게 커 온 사람으로서 직장을 잡고 난 후로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SK텔레콤에서 이 회사의 첫번째 무선인터넷 서비스 ‘n-Top’ 출시 업무를 맡은 뒤 미국 SK텔레콤인터내셔널(현 SK텔레콤아메리카)의 초대 사장으로 재직했다. 사장직을 그만둔 뒤부터 이 회장의 벤처 인생이 시작된다.

 SK텔레콤의 자회사 개념으로 출발한 이노에이스 대표를 맡아서 간섭신호제거(ICS) 중계기 개발을 시작했다. 날아다니는 전파를 어떻게 제어하느냐는 의심을 많이 받았다.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결단을 내리고 독립해 2004년 알에프윈도우를 차렸다. 1년만에 보란듯이 ICS 중계기 개발에 성공했다.

 중계기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시련이 닥쳤다. 공동 연구를 진행하던 대기업에서 기술을 빼돌린 것. 이 회장은 “대기업을 믿고 연구소를 개방했는데 다른 연구소를 우리 모르게 차려놓고 기술을 가져가고 있었다”며 “대기업이 중소기업 기술을 훔치거나 할 때 철퇴가 내려지지 않는 우리나라의 제도가 문제”라고 말했다. 이런 풍토에서 중소기업을 지탱해 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이 회장은 아예 해외로 눈을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대기업 눈치 안 보고 사업할 수 있는 길은 해외 시장에 나가서 스스로 몸집을 키워 오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알에프윈도우는 일본시장에 주목했다. 이 회장은 직접 일본을 여행하며 시장을 분석했다. “한국은 산골짜기,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휴대폰이 터질 때 일본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도심밖에 없었다”며 “무선통신 전파 음영 지역을 커버할 수 있는 중계기 사업이 먹혀들만한 시장이라고 봤다”고 말했다. 일본 내 통신 3위 사업자 소프트뱅크를 접촉했다. 1·2위 사업자보다 약한 사업자가 빨리 움직인다는 데 착안했다. 복병은 일본의 법이었다. 중계기를 쓰는 게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이 회장은 중계기에 대해 논문을 쓰고 일본어로 번역해 발표하고, 일본 총무성의 인증기관에서 시스템을 직접 시연해 보였다. 철통같은 일본 정부가 8개월 만에 빗장을 풀어줬다. 소프트뱅크와 4000만달러의 첫 공급계약을 맺었다. 문제는 또 나타났다. 중계기를 하나하나 설치할 때마다 공무원의 실사를 받고 전파 허가, 준공검사를 받아야 했던 것. 한국에서는 소출력 중계기는 형식 승인만 있으면 사업자가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었다. 이같은 사례를 들어서 일본 정부를 설득했고, 형식 승인만 받고도 중계기를 설치할 수 있는 ‘포괄 면허’ 제도를 이끌어 냈다. 이 회장은 “이처럼 규제 개선까지 한국 회사가 하고 나니까 일본 내 1·2위 사업자도 우리 제품을 도입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알에프윈도우는 일본 통신 3사 NTT도코모·KDDI·소프트뱅크의 직접 협력사가 됐다. 일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자 다른 나라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남미·유럽에서도 고객을 확보했다. 이 회장은 “회사 실적이 널뛰면 투자자들은 물론이고 회사 경영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며 “서로 다른 회계연도를 쓰는 외국 회사와 거래하면 한 쪽에서 주문이 없을 때 다른 쪽에서 공급 요청이 들어와서 부족분을 메워준다”고 말했다. 일단 재무구조를 탄탄하게 만든 뒤에 상장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갖추기 위해 제품군도 다양화했다.

 근거리 통신방송 기술 피코캐스트를 기반으로 무선인터넷(IP) 사설교환기(PBX) 개발을 마쳤다. 제품이 출시되면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게 된다. 엑세스포인트(AP)만 설치하면 인터넷망을 이용해서 통신할 수 있게 된다. 무선주파수(RF)중계기 ‘솔로(Solo)’도 주력 제품 중 하나다.

 이 회장은 알에프윈도우를 급속도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긍정적인게 제일 크다.” 사기를 당한 적도 많고, ICS중계기나 CDMA를 개발할 때도 안된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된다는 믿음을 갖고 결국 성공시켰다. 피코캐스트 기술에도 10년 동안 꾸준히 자원을 투입해서 드디어 결실을 눈앞에 뒀다. 환헤지상품 키코(KIKO) 때문에 수백억 손실을 봤을 때도 꿋꿋하게 대처했다. 그는 “사심이 없는 것”을 또다른 이유로 들었다.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거나 오너로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포인트”라는 것이다. 그는 “골프치고 고급 술집에서 술 마시는 중소기업 오너들이 꽤 있는데, 그런 것 안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해외 고객사를 상대하다보니 접대 할 일도 없고, 직원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기술을 선도하고 고객을 중요시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자는 그의 경영철학을 직원들과 공유하는데 도움이 됐다.

 그는 끝으로 정도경영을 강조했다. 이 회장은 “사심을 버리고 정도를 걸으면 대박나는 회사는 아니더라도 좋은 회사는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은 몇 년전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한 병을 앓았다. 얼굴에서 죽음의 기운까지 느낀 이 회장은 동양의학을 공부했다. 건강한 식생활 방법을 찾아내 결국 스스로 병을 고쳤다. 최근에는 자신의 건강 비법에 대한 강연도 하고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맞춰서 살면 병을 앓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에서 삶에 대한 태도가 엿보였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