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반도체 산업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은 나라가 있다. 대만이다. 미디어텍·노바텍 등 연매출 10억달러가 넘는 팹리스(공장 없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반도체 회사)와 TSMC·UMC 등 세계 최대 파운드리(수탁생산회사)를 보유한 대만은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귀감이다. 대만 반도체 산업을 세계적인 입지에 올려놓은 것은 유기적으로 연동돼 움직이는 튼튼한 에코시스템이다. 대만 반도체의 성공은 대학과 연구기관, 업계의 밀착관계에 기반을 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벤처 창업이 활성화돼 있으며, 팹리스 산업은 파운드리 업체의 지원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거두고 있다. 전문화된 기업군을 이뤄 분업체제를 형성한다. 연구기관은 인력을 양성하고 신규기술 개발을 맡는다. 연구기관 창업도 장려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의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출발점은 비슷하다. 연매출 30억달러가 넘는 미디어텍도 1997년 설립된 회사다. 국내 주요 팹리스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설립된 점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대만과 국내 팹리스 간 격차는 점차 확대됐다. 지난해 아이서플라이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 국내 팹리스 기업들은 10억달러 매출에 그친 반면에 대만 팹리스 기업은 총 100억달러의 매출을 올려 매출 격차가 10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팹리스 기업이 성장과 퇴보를 반복하면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 대만의 팹리스 기업은 이미 세계 글로벌 팹리스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셈이다. 최근 대만 팹리스 산업을 분석한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은 “이 같은 희비쌍곡선은 에코시스템 차이에서 발생했다”고 결론지었다.
국내에서도 시스템반도체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산업계와 학계, 연구기관, 정부로 이어지는 에코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산업계는 인력부족으로 아우성인데다 앞으로 그 심각성은 더해질 것으로 보여, 업계 간 협력뿐만 아니라 학계-연구기관-산업계가 맞물린 에코시스템은 중요도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있는 인프라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열악한 현실이지만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국내 산학연 성과와 과제=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98년, 한국도 시스템반도체 씨앗을 키우자는 취지에서 시스템IC 2010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올해로 마무리되는 시스템IC 2010 프로젝트는 많은 성과와 과제를 남겼다.
지난 13년 동안 총 182개 과제를 334개 기관이 참여해 완성했다. 참여한 인력만도 4000명이 넘고 2400억여원이 투입됐다. 이들 과제는 기반기술은 물론이고 산업계가 기초체력을 다지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이들 과제를 통해 개발되고 상용화된 기술은 참여했던 업체 매출의 20% 정도를 차지하면서 산업 성장에도 도움을 줬다. 수출을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고화소 CIS, 디스플레이구동칩, 핵심코어를 비롯해 각종 공정기술 개발에도 기여했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시스템반도체 분야 국책과제가 진행될 예정이다. 시스템IC 2010 사업은 올해 막을 내리지만, 7월부터는 새로운 포스트 시스템IC 2010이 진행될 예정이다. 5년 정도로 진행되며, 규모는 연간 3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민간과 정부가 각각 150억원씩 분담한다. 이외에도 R&D 전략기획단의 조기시장창출형 과제를 통해 LTE 모뎀칩도 업계와 연구기관의 공동 연구를 통해 진행된다.
정부 과제에 대한 기대는 크다. 이를 통해 업체가 직접 매출을 올리려고 해서가 아니다. 이들 과제를 통해 인력을 키우고, 기반 기술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업체와 업체, 학계와 연구기관의 공동참여를 통해 인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효과를 낼 수 있다.
규모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이 잘할 수 있는 기술을 함께 발굴해 내는 과제들이 이어지면, 과제에 참여해 함께 개발한 인력의 수준도 높아질 수 있다. 구인난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대안은 기존 인력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산학연이 공동 참여하는 과제는 플랫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경종민 KAIST 교수는 “앞으로 주류가 될 만한 분야를 먼저 내다보고, 이 분야에서 생태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국책연구소는 코어와 스핀오프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은 실용연구를, 연구소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플랫폼이 없이는 단기 이익을 얻는 데 그칠 가능성이 높고 플랫폼을 만들어 놓으면 시간이 걸려도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며 “플랫폼을 만들고 이끌어갈 커다란 하나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만 산학연 협력 어떻게 운영되나=대만은 업계별 분업체제가 잘 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연구기관의 기초기술, 인력 양성 역할도 뛰어나다. 협력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클러스터도 조성돼 있다. 중국과 대만 제조업체들은 이들의 고객이 돼 시장도 잘 다져지게 됐다. 여기에 엔지니어들의 자국 산업에 대한 애정도 한몫했다. 이 모든 것이 대만의 시스템반도체 산업 에코시스템에 녹아 있다.
에코시스템 핵심에 놓여 있는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TRI)의 예를 들어보자.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1973년에 설립된 이 기관은 과거 노동집약적 대만 경제를 고부가가치 IT 지식기반 사회로 바꾸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산학 연구협력을 통해 첨단 기술을 연구하고, 향후 이를 산업계에 이전시켜 산업의 고부가가치 창출을 유도했다. 또 벤처 창업을 장려해 수많은 기업이 이 기관으로부터 직간접으로 스핀 오프됐다. 오픈 랩을 통해 신규 프로젝트를 민간과 별도로 진행하기도 하는데, 상당수 기술이 상용화됐다.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은 이런 식으로 ITRI와 협력해 기술을 개발하고,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 ITRI가 설립된 이후 스핀 오프된 회사만 수십개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은 보고서에서 “ITRI에서 개발한 기술을 창업으로 유도함으로써 기술 상용화 성과를 거두고 향후 해외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도 해소하게 된다”며 “게다가 연구기관이 시장 흐름을 재빨리 쫓아가지 못하는 부분은 이 같은 기업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연구기관의 제약을 없앴다”고 설명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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