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식품 포장필름 생산업체 태방파텍의 정희국 사장은 지난 6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일본의 전통식품 `낫토(納豆)`를 전문적으로 생산ㆍ판매하는 아즈마식품과 연간 4500만엔 규모 식품포장지 공급계약을 최종 마무리하고 오는 길이었다.
정 사장은 "아즈마식품은 연매출액 150억엔 규모의 일본 낫토업계 3위 대형 식품회사"라면서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낫토 포장재 공급권을 따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식품업체들은 요즘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포장재 업체를 구하느라 혈안이 돼 있다"면서 "과거에 한국 업체를 상대하지도 않던 이들이 제 발로 찾아와 우리 제품 품질을 살펴보더니 계약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발전기 생산업체인 케이디파워 김포공장. 일본의 세계적 식품회사인 산토리사 관계자 8명이 이 회사 발전기를 살펴보며 "스고이(굉장하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김임배 케이디파워 대표는 "부품이 아니라 완제품으로 발전기를 일본 시장에 수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산토리사에 공급하는 1500㎾ 규모 발전기 4대에다 추가 계약까지 합하면 연내 일본 수출만 200억원대에 달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우리 기업들에 `난공불락`과도 같았던 일본 시장이 열리고 있다. 그 선봉에는 중소기업들이 있다. 세계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삼성ㆍ현대차ㆍLG 등 국내 대기업들이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철수했던 일본 시장에서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특히 지난 3월 대지진 이후 생수ㆍ라면 등 식음료와 합판과 같은 구호물자를 시작으로 촉발된 대일본 수출이 두 달 연속 사상 최고 실적을 이어가면서 이번에야말로 일본 시장에서 한국 제품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5일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달 대일본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63.5% 증가한 35억8000만달러를 기록해 월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바로 직전 최고치를 기록했던 3월 32억7000만달러보다 3억달러 이상 늘어난 실적이다. 관세청 관계자는 "석유제품과 철강ㆍ화공품, 자동차부품, 무선통신기기 등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고 특히 생수ㆍ라면ㆍ합판 등의 수출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면서 "월간 단위로 대일본 수출이 60%대 증가율을 보인 것은 사상 처음"이라고 말했다.
`욘사마`에 열광하면서도 한국 제품은 철저하게 외면했던 일본 기업들도 과거와는 다른 눈길로 한국 제품을 대하고 있다. 대지진 사태 이후 위기 탈출의 고육지책으로 선택했던 한국 제품의 품질에 만족하며 향후 지속적인 구매 의사를 밝히고 있다.
한국산 발전기 구매계약을 체결한 일본 오사카 지역 업체 관계자는 "지진 때문에 올여름 일본에는 전력대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며 "생각보다 뛰어난 한국 제품의 품질에 놀랐는데, 최근 애프터서비스를 위한 총판센터를 설립하는 등 품질과 서비스를 신뢰할 수 있어 구매하게 됐다"고 말했다.
물론 일본 업체들의 이 같은 변화는 우리 기업들이 자력으로 이끌어낸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지난 3월 발생한 일본의 대지진 여파에 따른 구호물품 수요 증가와 함께 생산차질을 견디지 못한 일본 업체들이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한국 제품 구매량을 늘린 탓이다.
이 때문에 최근 대일 수출 증가를 일시적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일회용품과 구호물자 대일 수출이 상대적으로 늘어나면서 기존 수출품 물량이 오히려 줄었고 핵심 부품ㆍ소재 수입물량은 여전하다"면서 "지진 복구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일본 시장은 또다시 넘기 힘든 벽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번 대지진 사태를 기회로 대일 수출 물꼬가 터지면서 한국 업체들의 기술력과 품질을 확인한 일본 기업들의 구매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란 긍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조유현 중소기업중앙회 상무는 "일본의 산업 기반이 대지진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 제 모습을 갖추려면 적어도 3년은 걸릴 전망이며 앞으로 수요도 꾸준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중소기업들은 일본 시장을 발판으로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김임배 케이디파워 대표는 "일본 시장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 세계시장 진출도 훨씬 쉬워진다"며 "일본시장을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 중소기업 대표는 "10년 걸려야 간신히 개척할 수 있는 일본 거래처를 이번에 잡을 수 있었다"면서 "직원들에게 `일본을 앞설 수 있는 기회 아니냐`며 품질에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매일경제 최용성 기자 / 용환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