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왕 유방(劉邦)의 전쟁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하지만, 이 전쟁은 흥미거리로서만이 아니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IT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말하는데도 아주 적합하다. 이 라이벌이 벌이는 싸움의 분수령은 제일 먼저 진(秦)의 수도인 셴양(咸陽)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의 본거지인 관중(關中)의 왕이 된다는 ‘함양 진격 사건’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처음에는 항우가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항우(BC233~BC202)는 진나라 말기 하상(下相:지금의 장쑤소성 쑤첸) 출신의 명문가 자제로서 키는 8척이 넘고 세발 달린 큰 솥(鼎)을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괴력을 가진 영웅적 인물이었고 잘 훈련된 최정예 정병 8000명을 거느렸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들도 항우의 깃발 아래 모이고 있었다.
반면에, 농민 출신으로 하급관리에 불과했던 유방의 시작은 미미했다. 유방의 주변 인물들은 한(韓)의 명망가 출신인 장량(張良)과 비교적 학문적 역량이 있었던 조참을 제외하고는 개 도살꾼, 상인, 나팔수, 마부, 무뢰배 등이었다. 즉, 주변 인물들로 보자면 유방은 시정잡배의 두목에 불과했다. 군사도 훈련되지 않은 자제 30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패배자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 사람은 항우였다. 비록 항우는 용맹하고 힘도 세고 천하를 품고자 하는 기개가 온 세상을 덮을 만 했지만 “먼 미래를 내다보며 전략을 구사할” 정도의 미래전략경영(통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우는 셴양에 도착하자마자 성공과 깊은 자만심에 취해 항복한 진왕 자영과 진의 종족을 몰살하고 셴양에 있는 아방궁을 불 태웠다. 그 불이 얼마나 컸던지 3개월 간이나 지속됐다. 그리고 항우는 진나라 황실의 모든 재물 보화들을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버렸다. 이처럼 항우는 단기적인 이익에만 급급하고 중장기적 판세의 흐름을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결국, 백성들의 눈에 항우의 행동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맡기기 힘든 사람’이라는 인식을 깊게 심어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한 때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우리나라의 IT기업들은 현재 초기의 성공에 안주하고 단기적 이익에만 급급하다 항우처럼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급속도로 모바일화되는 트렌드 속에서 국내 인터넷 업계는 모바일 검색 점유율 지존 자리를 구글 등 외국 포털에 넘겨줄 위기에 처해 있고, SNS는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외국 서비스의 천하가 됐다. 한국의 스마트폰은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고,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를 아직도 무시하고 있다.
필자가 예측하기에 만약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향후 1∼2년 안에 우리나라 IT산업은 ‘넛크래커 현상’(선진국과의 격차는 더욱 더 벌어지고 중국과 인도 등의 후발주자들에게 추격 당하면서 매출이 급감하는 현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앞으로 휘몰아칠 거대한 태풍의 신호탄에 불과하다. 정부와 기업들은 시급히 이에 대한 미래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최윤식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장 ysfutur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