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48>

윤동윤 체신부차관(오른쪽 세번째 )퀄?사 제이콥스 사장(“ 두번째)의 예방을 받고 CMA방식 공동개발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윤동윤 체신부차관(오른쪽 세번째 )퀄?사 제이콥스 사장(“ 두번째)의 예방을 받고 CMA방식 공동개발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CDMA승인(2)

 

 공동기술개발 물길은 멈추지 않았다.

 CDMA 첫 상용화로 가는 길은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와 퀄컴은 CDMA방식의 공동기술개발 계약체결을 놓고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한동안 계속했다.

 이원웅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무선통신개발단장(인천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역임)이 1991년 1월 18일 오전 10시 미국 퀄컴에서 양해각서(MOU)를 교환했지만 그것은 법적인 구속력이 없었다.

 퀄컴 측은 이 MOU 교환을 고리로 공동 기술개발에 적극성을 보였다.

 살머시 퀄컴 부사장이 그해 3월 20일 오후 한국으로 달려왔다. 그는 이튿날 대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CDMA방식의 장점과 공동기술개발 방식, 추진체계 등을 설명했다. 살머시는 기술료로 3000만달러를 요구했다. 살머시와 1차 협상 상대는 이원웅 단장이었다. 그 액수를 그대로 받아들일 이 단장이 아니었다.

 이 단장의 말.

 “처음 퀄컴에서 3000만달러의 기술료를 제시했습니다. ‘턱없이 너무 많다’면서 그들과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최종 1695만달러에 합의했습니다.”

 살머시가 제안한 계약방식은 단계별 독립계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3단계로 나눠 공동기술개발을 하되 단계별 공동개발이 끝나면 서로 평가를 해서 양측이 만족하면 다음 단계의 공동개발을 진행하자는 내용이었다.

 이혁재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부장(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의 회고.

 “일종의 미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퀄컴이 한국에 일시불로 거액을 요구할 경우 우리가 응한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당시로서는 CDMA방식의 이동통신기술이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불확실한 기술에 누가 거액을 내겠습니까. 퀄컴 측이 단계별 독립계약안을 제안한 것은 단계별 독립계약을 하면 한국이 응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도 상용화 확신이 없는 데 일시불로 돈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단계별 독립계약방식은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인 셈입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그해 4월 4일 체신부에 퀄컴과 공동연구를 위한 연구비지원을 요청했다. 기술자립을 위해서는 CDMA방식의 신기술을 도입해 취약한 국내 무선기술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체신부도 이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기술개발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추진하고 있었지만 정책적 판단과 그 결정은 체신부 몫이었다. 그에 따른 연구개발비도 정부가 부담해야 했다.

 이 업무는 박성득 전파관리국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과 이정행 기술과장(중앙전파연구소장 역임) 라인이었다. 박 국장은 자신의 전결로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 CDMA방식의 기술개발을 추진하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박 국장의 말.

 “CDMA방식의 기술이 미래를 내다보는 좋은 기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실용화가 우리 기대처럼 될지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공동기술개발을 해 제품을 앞당겨 상용화하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1991년 5월 6일.

 대전 한국전자연구소 회의실.

 경상현 소장(한국전산원장, 체신부 차관, 정통부 장관 역임, 현 KAIST 겸직교수)과 어윈 제이콥스 사장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MIT 동문이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두 사람은 CDMA 관련 원천기술을 배우기 위해 원천기술 이전과 시스템과 단말기 설계와 개발 등에 관한 공동기술개발협약을 체결했다. 이는 정식계약이 아니었다. 일종의 가계약이었다.

 개발협약 기본 내용은 퀄컴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 제공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그 기술을 이용해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는 실시권(사용권)은 별도의 협약에 따르되 그 조건은 적정하게 하기로 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국내 산업체를 통해 기술실시권을 사용하며 미보유기술인 시스템설계와 기지국, 부품, 이동통신교환기 접속기술은 퀄컴의 개발기술을 이용키로 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이동통신교환기와 이동단말기를 개발한다는 협약이었다.

 단계별 개발연구비는 연구소가 퀄컴 측에 1695만달러(120억원)를 제공하기로 했다. 연구비는 퀄컴과 당초 합의한 1750만달러보다 55만달러를 삭감했다. 퀄컴은 일정액의 연구개발비와 원천기술을 제공해 CDMA 이동통신시스템을 공동개발하기로 했다.

 퀄컴은 CDMA방식 시스템설계와 기지국개발, 이동전화 기술설계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연구소는 이동통신교환기 개발과 기지국 장치개발, 이동전화기 응용개발, 국내표준 등의 업무를 담당키로 했다. 양측이 개발한 부문은 서로 교환해 동일한 구조의 이동통신시스템을 완성키로 했다.

 살머시 부사장 제안대로 공동기술개발은 단계별로 추진키로 했다. 가장 큰 이유는 CDMA방식 이동통신기술에 대한 성공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 공동개발 성공 가능성이 낮으면 다음 단계에서 공동기술개발을 포기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한국 측 입장에서는 일종의 안전판을 마련한 셈이다.

 1단계는 5개월간 전반적인 CDMA시스템 기술사항과 시스템 정의에 관해 공동 개발키로 했다. 2단계는 9개월에 걸쳐 이동시험시스템(RTS)의 국내 설치 및 필드시스템, 네트워크와 이동단말기 상위설계를 하기로 했다, 3단계는 5개월간 기반구조와 단말기의 하위설계를 통해 생산 전단계 기술을 개발키로 했다.

 이와 관련해 1단계에 190만달러를 지불하고 2단계 1000만달러, 3단계에 505만달러를 지불키로 했다.

 이날 서명식에서 일어난 일.

 공동기술개발 협약서에 서명을 끝낸 경 소장이 느닷없이 옆에 있던 팩텔의 한국지사장인 박헌서 박사(현 한국정보통신 회장)에게 펜을 내밀며 말했다.

 “박 사장도 여기 입회인으로 서명하세요.”

 “제가요?”

 박 사장의 입회인 서명에 대해 뒷말이 많았다.

 왜 민간업체 대표가 입회인으로 서명하느냐는 문제 제기였다. 하지만 연구소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원웅 단장의 말.

 “박 사장은 미국업체의 한국지사장이었기에 미국 측 기술관련 정보를 많이 그리고 빨리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그쪽 사정을 빨리 파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협약을 체결한 제이콥스 사장은 5월 8일 윤동윤 체신부 차관(체신부 장관 역임, 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을 방문해 공동개발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이 자리에는 박성득 국장과 이원웅 단장, 그리고 박헌서 박사 등이 참석했다.

 제이콥스는 관련 업체 경영자들과도 만났다.

 체신부는 CDMA방식 기술도입과 관련한 관계기관 회의를 몇 차례 열었다. 혹여 정식 계약서 내용에 하자 있을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이 부담해야 했다.

 그해 7월 26일.

 체신부 13층 회의실에서 열린 회의에는 박성득 체신부 전파관리국장 주재로 한국통신,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등 관계자 및 고문 변호사, 박한규 연세대 교수(현 연세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먼저 공동기술개발 합의서에 대한 검토를 했다. 합의서와 관련한 미비점을 집중 논의했다.

 박 국장의 회고.

 “회의에서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퀄컴과 공동개발에 참여하지만 개발 후 소유권이 없다, 또 퀄컴사 개발품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사용이 불가능하게 명문화해 제작 판매 권한이 없다, 합의서 내용에 대해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등의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회의에서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이런 의견을 모아 양측이 계약원칙에 따라 재작성하고 이를 관련부서에서 검토한 후 종합적으로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해 8월 5일 오후 5시.

 체신부 13층 회의실에서 CDMA방식 2차 기술도입관련 회의가 열렸다.

 박성득 전파관리국장이 주재한 회의에는 이원웅 단장과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이상덕 박사, 고문변호사 등과 연구평가위원장인 박한규 연세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1차 회의에서 지적한 내용을 토대로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다시 작성한 합의서를 검토했다. 체신부는 이정행 과장을 단장으로 연구소, 업계 관련자 등으로 CDMA 실사단을 구성, 미국으로 보내 기술동향을 점검했다.

 체신부는 이런 과정을 거쳐 학계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파육성협의회를 열어 1996년 자체 개발을 목표로 추진했던 디지털이동통신개발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그 핵심은 외국에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 앞당겨 국산화를 이룩하고 기술도 첨단방식으로 변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CDMA방식의 기술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국내에서 개발 중인 TDMA방식도 병행해 추진키로 했다.

 체신부는 그해 8월 23일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의 CDMA방식 이동통신기술도입을 승인했다. CDMA 첫 상용화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