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기틀을 만든 주역 `김완희 박사`

2009년 10월 30일자 전자신문에 실린 김완희 박사 인터뷰.
2009년 10월 30일자 전자신문에 실린 김완희 박사 인터뷰.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고 김완희 박사는 고인이 되기 전인 2009년 기자와 만나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컬럼비아 대학 종신 교수직을 뒤로하고 한국 전자산업 부흥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고인은 60년대 후반을 그만큼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했다. 그러나 그만큼 보람이 있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고 김 박사는 1960년대 한국전자공업 태동기에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당시 컬럼비아대에서 한국 최초 정교수로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었던 그는 ‘한국전자공업 발전을 위한 보고서’를 내고 초기 기틀을 잡은 이후에도 30년간 국내 전자산업을 설계해 전자산업을 최고의 수출산업으로 키워냈다.

 고인이 60년대 후반 8개월에 걸쳐 200여명에 달하는 전문가와 함께 내놓은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조사 보고서’는 영문으로 총 4권, 10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전자산업의 필요성 등을 적시했다. 보고서는 고인이 제2대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1978∼1982년)에 취임함으로써 전자공업 정책 전면에 나서기까지 15년 동안 한국 전자공업의 확장기 때 일종의 복음서로 통했다. 전자공업의 기반 구축에 대한 방향과 기업인들의 전자공업에 대한 신규투자 지침서 역할을 했고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 제정을 포함해 상공부·과기처 등 정부 부처 정책입안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고인은 1979년까지 국내에서 대통령 특별 자문, 상공부와 과기처장관 고문을 지내면서 전자공업진흥법 제정을 건의하고 전자산업 육성 마스터플랜 수립에 기여했다. 전자공업진흥회 회장, 전자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82년에는 전자시보(현 전자신문)를 창간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한 2009년에는 국가기록원에 박 전 대통령과 12년간 주고받은 친필 편지 103통을 기증했다. 기증식과 관련해 마지막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와 만나 전자산업 육성의 마스터플랜을 짰던 당시를 회고하며 “백지 상태에서 외부 도움 없이 자력으로 이뤄냈다는 게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라며 “그만큼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는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했다”라고 말했다.

 특히 전자산업 육성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을 강조하며 “박정희 대통령은 ‘전자’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당시,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전자 분야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명확한 현실 인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당시 정책 입안자들이 산업의 이해도가 조금만 높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전자 강대국으로 성장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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