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템이 대상 받았다. 우리가 외고랑 자사고를 이겼다고.”
나리가 휴대폰에 대고 울먹이며 외쳤다.
“꺅!”
친구의 환호성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로비에 모인 모두는 울음과 웃음이 뒤범벅돼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우리가 진짜 대상 맞아요?” “기자 아저씨, 우리가 이겼다고요.”
몇몇은 결과가 믿기지 않는 듯 선 지도교사와 기자에게 재차 물었다. 한 친구는 트로피를 감싸 안고 입을 맞췄다. 다른 친구들도 감격에 겨워 연방 발을 굴렀다. 열 여덟 재기 발랄한 미림여자정보과학고(이하 미림정보고) 학생들의 환호성은 현장을 가득 채웠다. 지난 6일 인천 송도동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한국사업대회 2011’ 결승전이 끝난 뒤 벌어진 광경이다.
창업동아리 사이에서는 유명인사 축에 속하는 이들도 이번 대회는 다소 낯설었다. 참가자 대부분은 외국어고, 자율형사립고 학생이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화려한 쇼맨십을 보유한 다른 친구들을 볼 때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2박 3일 동안 다른 학생들의 준비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올해 과제로는 ‘자연재해 예방과 피해 복구를 위한 사업 아이템 개발’이 제시됐다. 참가자들은 하룻밤 사이에 창업 아이템을 찾아내 발표해야 한다. 여느 창업 관련 대회와는 다른 진행 방식이다. 미림정보고 학생들도 밤을 새우다시피 했지만 준비가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만난 아라는 “우리 아이템 완성도가 훨씬 뛰어나요”라면서도 “조금 더 연습했어야 했는데 뭔가 부족한 것 같아요”라며 불안해했다. 30팀 가운데 총 7팀이 결승에 올랐다. 미림정보고 학생들이 꾸린 ‘미벤’ 팀은 가장 마지막에 호명됐다.
천안 북일고의 ‘Sforzando(강렬하게)’ 팀이 결승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섰다. 이들은 붕괴현장에서 구조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Rescue ball’이란 아이템을 들고 나왔다. 근거리 주파수를 발산하는 공을 붕괴한 건물 안으로 투입하면 틈새로 들어가 생존자를 찾아낼 수 있다고 했다.
다른 팀은 발표에 SWOT 분석까지 가미해 눈길을 끌었다. 어떤 팀은 콩트 형식을 채택했다. 방송 뉴스처럼 동영상을 만들어 프레젠테이션에 집어넣었다. 대통령에게 사업 아이템을 소개한다는 설정으로 관심을 끈 사례도 있었다. 발표를 지켜보면서 미림정보고 학생들의 속은 타들어갔다.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서로 다독여보지만 떨려오는 감정은 숨기기가 어려웠다.
마지막은 ‘미벤’ 팀의 차례였다. 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단상에 올랐다. 발표는 보라와 선경이가 맡았다. 선경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생존의 삼각형’을 아시나요?” 지진이 일어났을 때 건물이 붕괴해도 살아남으려면 안전한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존의 삼각형이라는 설명이었다. 보라는 집 안에서 생존의 삼각형을 확보할 수 있는 책상을 소개했다. 다리에 경첩을 빼면 직각삼각형의 공간이 책상 아래에 마련돼 건물 붕괴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주어진 10분 가운데 5분 만에 발표가 끝났다.
“구조적으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일반적인 책상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있다고 보나요?”
질문이 줄을 이었다.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나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지만, 차근차근 설명하려 애를 썼다.
이렇게 모든 발표가 끝났다. 예상 시간을 넘겨 30여분이 지나서야 시상식이 시작됐다. 장려상부터 금상까지 네 팀이 차례로 호명됐다. 금상은 북일고 학생들에게 돌아갔다. 우울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미림정보고 친구들은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우리는 아닌가 봐.” “애썼으니까 괜찮아.” 몇몇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때 들려오는 사회자의 목소리.
“영예의 대상은 G조의 ‘미벤’입니다.”
미림정보고 친구들이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이날 심사를 맡은 이희성 인텔코리아 사장은 “창업 아이템의 최우선 조건은 당장 사업화할 수 있는 현실성”이라며 “다른 팀의 아이템은 대부분 아이디어 차원에 머물렀다면, 미벤 팀은 실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고 설명했다. 결과 발표가 늦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1, 2위의 점수 차이가 거의 없었는데 본선 경쟁력과 실현 가능성을 두고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말했다. 결국 영어 실력이나 발표 능력을 지닌 외고와 자사고 학생들보다 창의적인 사고와 실현 가능성을 보유한 마이스터고 학생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미림정보고 학생들의 최대 강점이었다.
민족사관고에서 온 전형미 학생(17)은 “특성화고등학교 친구들이 실무적인 면에서 확실히 앞서나간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우리 학교에서도 사전에 특성화된 기술을 지닌 친구들을 모아 대회를 준비한다면 훨씬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상을 받은 학생들은 오는 18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세계사업대회에 출전한다. 아직 대회 준비위 측에서 후원자를 구하지 못한 탓에 참가는 인터넷으로 대신한다. 동영상을 촬영해 세계대회 준비위 쪽에 보내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런데도 미림정보고 학생들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나리는 “대회 기간 동안 짜증도 내고 다툼도 있었지만 모두의 노력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며 “매번 제 몫을 못해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오늘에야 제대로 보답한 것 같다”고 기뻐했다.
<박스>한국사업대회는
세계사업대회는 2001년 뉴질랜드에서 처음 시작됐다. 뉴질랜드신탁 사장인 켄 베이커와 스코틀랜드엔터프라이즈컨설팅의 고든 멕비가 힘을 합쳐 창설됐다. 2008년부터는 오스트레일리아 비즈니스위크의 창립 이사인 노먼 오웬스의 주관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고 있다. 규모와 인지도 면에서 성장을 거듭하면서 청소년들이 창업 아이템을 내놓고 겨루는 장으로 변모했다.
한국사업대회는 세계사업대회의 공식 한국 예선이다. 2009년 처음 시작돼 올해로 4회를 맞이했다. 이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이 대회 전반을 진행하고 관리한다는 점이다. 이전 대회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이듬해 대회 진행자로 나선다. 이들은 참가자의 멘토로서 각종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멘토 대부분이 외국 유수 대학에 진학했다는 점도 특징 중 하나다. 이 때문에 대회 참가자들은 멘토로부터 외국 대학의 입학 정보를 얻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
올해 대회는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첫날에는 기업가정신에 대한 강의와 사업계획서 작성을 위한 기본 교육이 마련됐다. 참가자 대부분이 창업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소 낯설어하는 점을 고려해서다. 정식 일정은 이튿날부터다. 24시간 동안 계속되는 대회 일정 속에서 참가자들은 주제에 맞게 사업 아이템을 선정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참가자는 자료 제작을 위해 밤을 샌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평소 경험하지 못한 협업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된다. 몸은 피곤하지만 머리와 마음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실제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대회 참가의 의의로 협업을 꼽았다.
한영외국어고 강희석 학생(17)은 “혼자 생각하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가 논의 도중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대원외국어고에서 온 하동희 학생(17)도 “여기 오기 전에는 창업에 대해 잘 몰랐다”며 “선배들이랑 교류도 많이 할 수 있고,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밤을 새워 노력했다는 점에서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표> 한국사업대회 평가 기준
1. 창의성
2. 재정과 생산
3. 마케팅
4. 소통
5. 사회적 책임
6. 세계화
<인터뷰> 유예슬 한국사업대회 진행위원 대표
“이 대회에는 어른이 없습니다. 학생에 의한, 학생을 위한 대회가 바로 한국사업대회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유예슬 한국사업대회 진행위원 대표(20)는 한국사업대회의 특징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학생이 주도하는 행사인 탓에 미숙한 점도 많지만 그 이상으로 값진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것이 유씨의 설명이다.
그는 “저희가 행사 진행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시간 지연이나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해를 거듭하면서 더욱 더 발전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처음 대회와 인연을 맺었다. 고등학생 때 대회에 참가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듬해 운영위원으로 참여했고, 올해는 대표직을 맡아 대회 전반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현재는 미국 보스턴대에 재학 중이다. 대회 진행위원 대부분은 유씨처럼 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돌아와 진행을 돕고 있다. 좀 더 많은 학생들이 견문을 넓힐 수 있고 세계로 뻗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해가 지날수록 참가자의 창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유씨의 생각이다. 이전에는 참가자들이 주로 소비자나 수용자의 역할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생산자인 동시에 주체로서 창업을 고민한다는 것이다.
유씨는 정부나 관련 기관이 청소년의 창업 문화 확산에도 힘을 쏟았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창업 아이디어는 다양한 연령대에서 굉장히 다채롭게 나오는데, 청소년을 위한 창업 관련 지원은 많지 않은 듯합니다. 청소년에게도 많은 기회를 제공했으면 좋겠고, 이런 대회의 후원이 적극적으로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박창규기자 k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