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52>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52>

 CDMA업체 선정(5)

 

 기술추종국(追從國)에서 기술종주국(宗主國)으로 가는 길은 복잡다기(複雜多岐)했다. 정부는 CDMA 공동개발과 함께 단말기와 교환기, 핵심 부품 등을 생산할 업체 육성에 시동을 걸었다.

 1992년 12월 14일.

 체신부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가 진행하는 CDMA방식 이동통신시스템 개발과 생산을 담당할 국내 지정업체를 선정, 발표했다. ETRI에서 기술을 이전받아 단말기와 기지국, 교환기 등을 생산할 업체들이었다.

 이동전화교환기 및 기지국 장비 생산업체로는 금성정보통신, 삼성전자, 현대전자 등 3개사가, 단말기부문은 이들 3개사와 맥슨전자 등 4개사가 뽑혔다.

 개발업체 선정작업은 그해 9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ETRI가 주관했다. 분야는 단말기와 기지국, 교환기 등 3개 분야로 정했다. 업체 자격은 △외국인 주식비율이 49%이하인 한국법인 △전자기기 또는 통신기기를 생산 판매하는 기업 △대기업의 경우 1개 회사만 참여할 수 있게 정했다. △같은 기업의 다른 분야 중복 참여를 허용하고 △참여 업체는 연구개발비 부담금을 ETRI에 납입해야 하며 △연구개발 성공 후 정부 지원금을 상환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제시했다.

 ETRI는 그해 9월 7일과 16일 두 차례의 설명회를 거쳐 분야별 참가 제안서를 25일까지 접수했다. 그 결과 단말기와 기지국, 교환기 분야에는 금성정보통신과 삼성전자, 현대전자 등 3개 업체가 신청했다. 맥슨전자는 단말기 분야에만 신청했다.

 ETRI는 산학연관 전문가 8명으로 선정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안병성 이동통신기술연구단장(작고)이 맡았다. 이어 기술과 재무, 영업을 심사할 평가위원회를 12명으로 구성해 최종 업체를 선정했다.

 선정작업에 참여했던 이혁재 ETRI 부장(현 KAIST 전기정자학과 교수)의 회고.

 “퀄컴과 2단계 계약에 따라 시스템을 생산할 지정업체를 선정했습니다. 당시 단말기와 교환기를 개발할 업체는 금성정보통신과 삼성전자,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 현대전자 등 5개사가 전부였습니다. 이들과는 초창기부터 수시로 모여 공동개발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어요. 선정 절차는 엄격히 지켰지만 단말기와 교환기, 기지국에 참여할 업체는 이들 말고는 없었어요. 대우통신과 동양전자통신은 제안서를 내지 않았습니다. 막판에 대우통신이 사업참여 의사를 밝혔으나 심사가 진행 중이어서 결국 참여하지 못했어요.”

 이들의 불참 이유는 경영난과 로열티와 공동연구비 부담 때문이었다고 한다.

 ETRI가 선정한 업체는 그해 11월 9일 이동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 심의를 거쳐 최종 개발업체로 확정, 발표했다.

 기술개발체계는 ETRI가 퀄컴과 CDMA원천기술을 바탕으로 상용제품을 설계하면 업체들이 그 설계에 따라 각기 분담 분야 시스템을 만들어 납품하고 이를 ETRI가 전체 시스템으로 통합해 업체들에게 기술을 이전해 주는 방식이었다.

 ETRI와 퀄컴은 TDX-10을 모체로 해 이동전화교환기부문을 개발하며 기지국과 단말기는 개발업체들이 퀄컴과 로열티 계약을 맺은 후 핵심기술을 이전받기로 했다. 당시 퀄컴의 CDMA관련 특허는 53개였다.

 ETRI와 지정업체 간 공동개발 계약과정에서 개발비 부담금과 현대전자에 대한 교환기술 이전문제 등이 불거져 난항을 겪기도 했다.

 ETRI는 그해 1월부터는 이동통신핵심부품 개발업체 선정작업도 주관했다.

 체신부는 국내 이동통신기기 자립기반 구축을 위해 이동통신 핵심부품을 개발할 업체를 지원키로 하고 선정작업을 ETRI에게 맡겼다. 대상은 이동통신시스템 부품 7종과 휴대용 이동전화기 부품 14종, 이동통신기기류 부품 4종 등이었다.

 ETRI는 그 해 4월 개발업체 선정 공고를 낸 뒤 업체로부터 개발제안서를 접수했다. 마감결과 116건을 접수해 평균 4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휴대용 이동전화기 VCO개발 분야는 경쟁률이 10 대 1로 가장 높았다.

 심사는 그해 4월 29일과 30일간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했다.

 부품업체 심사를 담당할 과제심의위원회는 산학연관 전문가 등 12명으로 구성했다.

 위원장은 이원웅 부소장(인천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역임)이 맡았다. 위원회는 산하에 3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해 무선분야는 1분과, 부품분야는 2분과, 기기분야는 3분과에서 각각 심사를 했다.

 체신부는 5월 23일 이동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 심의를 거쳐 ETRI 주관으로 선정한 업체 38개사를 최종 확정, 발표했다.

 확정한 개발과제는 △RF칩(고주파칩), 신호처리용 ASIC(주문형반도체) 등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핵심부품 8종 △RF필터(고주파여파기), 주파수합성기 등 휴대폰 핵심부품 14종 △무선호출수신기 등 기타 이동통신기기류 4종 등 총 26개 과제였다.

 개발기간은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핵심부품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3년간, 휴대전화기 핵심부품과 기타 이동통신기기류는 1996년까지 5년간으로 했다.

 이영규 ETRI 본부장(TTA전문위원 역임)의 회고.

 “심사장에서 신청업체 대표가 제안서 내용을 10분씩 발표하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기업이 팬택(현 팬택계열)이었습니다. 팬택은 1991년에 창업한 벤처기업으로 박병엽 사장(현 팬택 부회장)이 당시 갓 서른살이었습니다. 자신만만하고 딱부러지게 사업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심사에 참여했던 이혁재 부장의 기억.

 “팬택은 개발업체로 선정돼 2년 정도 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지원액이 1억원 정도였습니다. 사업이 매년 급성장하자 자금을 지원받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자금을 더 지원받아도 되는데도 거절했습니다. 당시 선정한 업체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잠시 팬택의 화려했던 과거를 살펴보자.

 팬택은 1991년 박병엽 사장이 창업했다. 직원은 6명, 자본금은 4000만원이었다. 영업사원이었지만 맥슨전자에서 임원급 대접을 받았던 그는 29살에 창업했다. 무선호출기를 만들었다. 이듬해 무선수신기호출 분야에 제안서를 냈다. 1억원의 자금지원을 받은 팬택은 우수한 기술력으로 해마다 엄청난 상승세를 기록했다.

 1997년 매출이 762억원이었다. 휴대전화기 생산에 뛰어들어 2001년 현대큐리텔을 인수했다. 2003년 매출 2조원, 2005년 매출 5조원을 달성했다. 승승장구하던 팬택에 위기가 닥쳤다. 유동성 위기에 빠져 2006년 11월 25일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그리고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낸 후 올 들어 지난 5일 미국에서 스마트폰 ‘크로스 오버’를 출시했다.

 이듬해인 1993년 3월.

 안병성 단장은 한기철 부장(현 ETRI 책임연구원)과 이성경 부장 등 연구진과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미국 달라스에서 열리는 CTI쇼를 참관하고 이어 샌디에이고로 가서 퀄컴사를 방문했다. 안 단장은 CDMA방식 이동통신개발의 한국 측 실무책임자였으나 퀄컴 방문은 처음이었다.

 한 부장의 회고.

 “안 단장은 취임 후 퀄컴에 곧장 가지 못했습니다. 국내에서 지정 개발업체 선정 등 할 일이 많았습니다. 퀄컴사가 한국 측 공동개발 파트너인데 실무책임자가 직접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건의해 일정을 잡았습니다. 퀄컴에는 연구원들이 파견돼 2단계 공동기술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안 단장은 퀄컴에서 제이콥스 회장과 만나 양측의 효율적인 2단계 공동개발 등에 관해 논의했다. ETRI와 퀄컴은 원활한 공동 연구를 위해 2개월에 한 번식 상호 교환방문을 하기로 합의했다. 5월에는 퀄컴 연구진들이 한국으로 왔다. 그해 4월부터 교환기와 단말기 업체들은 업체당 34명의 개발인력을 ETRI와 퀄컴에 파견해 6개월간 공동 설계 작업에 참여했다.

 안 단장은 기술이전과 시스템 구조 등을 놓고 퀄컴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퀄컴 측이 한국에 이전해 주는 원천기술 지연과 시스템 구조변경 등으로 상용화 일정이 늦어졌다. 그는 퀄컴 측과 이미 계약한 내용도 따지고 들어 퀄컴을 곤혹스럽게 했다. 특히 전송교환방식을 놓고 퀄컴과 시각차이가 컸다.

 그해 8월, 국내 지정 업체들은 퀄컴과 로열티 협상을 마무리 했다.

 퀄컴과 기술이전과 관련한 협약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퀄컴과 ETRI 간 공동기술개발 협약이었다. 다른 하나는 퀄컴과 국내 지정 개발업체 간 기술사용 협약이었다.

 국내 제조업체들은 CDMA기술이 적용되는 부분에 대해 일정 비율의 로열티를 국내 13년, 국외 15년간 지급하기로 했다. 국내 판매용 단말기의 경우 매출액 5.25%, 수출은 5.75%로 했다. 기지국 무선장비는 국내 6.0%, 수출은 6.5%를 내기로 했다. 다만 퀄컴이 국산 기지국 장비를 구매할 경우 5%의 로열티를 내기로 했다. 이런 로열티는 AT&T나 모토로라 등과 맺은 5%보다 최고 1.5%나 많은 액수였다.

 한기철 부장의 말.

 “ETRI와 퀄컴이 맺은 로열티는 5%였습니다. 이는 국내기업들에 가이드라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업체별로 기술수준이 다르고 별도의 협상 카드에 따라 로열티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낮게 로열티를 결정한 기업의 경우 관련 특허기술을 상호 이용하는 교차라이선스 계약을 했을 것입니다. 당사자 간 협상이고 대외비 사항이어서 전혀 내용을 알 수 없었어요.”

 한국 업체들은 처음 공동 협상을 진행했으나 현대전자가 이를 깨고 퀄컴과 가장 먼저 로열티 계약을 했다.

 이혁재 부장의 증언.

 “현대가 공동전선을 깨고 먼저 계약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어요. 현대는 다른 업체에 비해 교환기 기술이 부족했습니다. 초조했죠. 현대로서는 빨리 기술을 이전받아 다른 업체와 동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고 싶었을 겁니다. 별도 기술을 이전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남의 원천기술을 이전받아 세계 첫 CDMA상용화를 추진하는 과정은 칡과 등나무처럼 자기 이익 극대화를 위한 대립과 타협이 서로 얽혀 돌아갔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