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 치열한 국내 가전시장에서 업계 1위가 두 업체 이상인 것은 그래도 봐줄만하다. 그러나 업체별 시장점유율을 더하면 100%가 한참 넘는 것을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는 공신력 있는 시장조사 자료라도 있었다. 가전업체 간 ‘분쟁’이 생기면 믿을 만한 시장조사기관이 이를 조정하는 ‘판관’ 노릇을 해왔다. 그러나 올해 들어 이 같은 역할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가전 매장들이 잇따라 유명 시장조사기관에 자료 제공을 거부한 것이다. 회사 영업정보를 굳이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동안 이들 기관의 자료를 받아 보던 업체들이 자료의 신뢰도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료 제공을 거부하거나 거부를 검토하는 업체들이 늘면서 자료의 신뢰도는 더욱 하락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불똥은 업계로 튀고 있다. 업체들은 시장조사 자료를 근거로 업계 흐름을 파악하고 이를 디자인이나 생산량 조절 등에 반영해왔다. 그러나 이런 자료가 없어진 지금 업계는 당장 경영계획 수립에 차질을 빚고 있다. 지도도 없이 전쟁에 나가는 군인 꼴이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소비자들이다. 수많은 제조사들이 넘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판단 기준을 잃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료를 수집해보지만 저마다 1위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고 출처 불명의 정보들이 난무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경험담을 듣고 사는 게 차라리 속 편하다. 진짜 코끼리의 모습을 보고 싶지만 소비자들이 보는 건 다리와 꼬리와 코와 귀 가운데 어느 하나일 뿐이다.
언제까지나 이런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다. 지금처럼 정보의 벽을 높이 쌓아놓은 상황에서는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공생의 정신이 필요하다. 시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정보라도 공유해야 한다. 업계 차원에서 협력을 해야 하고 정부나 관련 협회에서도 이번 기회에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가전시장의 옥석 구분을 위해서라도 힘을 모을 때다.
김용주 전자산업부 기자 kyj@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