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통신관리단 출범
1993년 9월 16일.
CDMA 방식 이동통신개발사업 추진체계가 변경됐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가 주도하던 CDMA 공동개발 방식을 업체 간 경쟁개발 형태로 바꾼 것이다. 체신부 결정이었다.
체신부는 이날 오전 9시 14층 회의실에서 장관 자문기구로 국책사업인 CDMA 방식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등 전파통신기술개발사업을 종합 관리할 ‘전파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를 발족했다. 의장에는 과기처 차관을 지낸 서정욱 박사를 선임했다.
체신부는 오전 11시 한국이동통신에 효율적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 추진을 위한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을 출범시켰다. 단장에는 서정욱 박사를 임명했다.
관리단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이마빌딩 8층에서 현판식을 갖고 본격 업무에 들어갔다.
관리단 설치는 윤동윤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 구상이었다. 윤 장관은 CDMA 방식을 국가표준으로 확정했고 상용화도 당초보다 2년 앞당겨 1995년에 완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시한을 못 박아 놓고 보니 걱정이 많았다. ETRI 상용화 의지는 강력했지만 진도가 더뎠다. 그는 제품 구매자인 한국이동통신에 관리단을 설치해 목표를 달성코자 했다.
윤 장관의 회고.
“고심하다가 관리단을 설치하기로 결심했어요. 서 박사에게 전화해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만나 점심을 하면서 관리단 구상을 밝혔어요. 서 박사는 통신 분야 전문가로 경험과 통솔력, 추진력 등에서 가장 적임자였습니다. 서 박사에게는 한국이동통신 사장과 같은 대우를 하도록 조치했어요.”
회고록에서 밝힌 서 박사의 증언.
“윤 장관 요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과거 TDX사업을 맡았을 때 그는 체신부 통신정책국장으로서 적극 도와주었습니다. CDMA 사업을 걱정하는 그의 의지와 충정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서 박사는 1957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텍사스 A&M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70년 귀국해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국산 무전기인 K-PRC6를 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ADD 소장까지 역임했다. 이후 TDX사업단장과 한국통신(현 KT) 부사장을 거쳐 과학기술처 차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을 역임했다. 1995년 3월 SK텔레콤 사장으로 취임했고 부회장을 역임한 후 1999년 김대중 정부시절 과기처 장관으로 발탁됐다.
관리단은 처음 13명으로 출범했다. 한국이동통신과 체신부에서 인력을 파견했다. 기술총괄은 이성재 부장(현 알에프원도우 회장)과 이주식 부장(현 SK텔레콤 전무), 기획팀은 조민래 부장(현 대한도시가스 대표), 행정총괄은 서석진 체신부 사무관(현 부산지방우정청장)이 담당했다. 이외에 권우성, 서창원, 문규란, 여준구씨 등이 일했다.
윤 장관은 원활한 사업추진을 위해 장관실에서 매주 경상현 차관(정통부 장관 역임)과 서정욱 단장, 양승택 ETRI 소장(정통부 장관, 동명대 총장 역임) 등이 참석하는 회의를 열어 추진상황과 문제점, 보완책 등을 점검했다. 이 자리에는 신용섭 체신부 연구개발과장(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이 배석해 회의 내용을 기록했다.
서 사무관의 말.
“저는 관리단에서 체신부와 관리단 간 업무조율을 담당했습니다. 정책적 문제도 해결했습니다. 매주 장관실 회의를 준비하고 회의에서 논의된 점을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서 단장은 취임 후 ETRI와 업체 간 CDMA 공동개발 방식을 업체 간 경쟁개발로 변경했다.
서 단장의 회고.
“공동개발을 경쟁개발로 전환해 업체들을 경쟁시키기로 했습니다. 공동개발을 하다 공멸하느냐, 경쟁개발로 한 업체라도 살아남느냐의 선택이었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과격했지만 목표가 분명했다. 공사와 ADD의 ‘상명하복’ 군 리더십을 연상하게 했지만 치밀함과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CDMA 상용화에 가속도를 낼 수 있었다.
서 단장은 “CDMA 개발은 1995년 말까지 끝내야 한다. CDMA 개발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밤낮 가리지 않고 개발팀을 독촉했다. ETRI와 개발업체 연구진도 그의 극성에 시달려야 했다. 간혹 큰소리가 나기도 했다.
제품의 사양기준과 기술관리, 규격 등을 총괄한 이성재 부장의 말.
“구매자 입장에서는 경쟁개발로 어느 업체건 제품만 개발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이동통신 요구사항에 맞는 제품을 만들면 구매해 준다는 것이었지요.”
관리단은 그해 12월 24일 사용자 요구사항을 만들었다. ETRI와 개발업체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공청회를 열어 기준을 마련했다. 시험절차서도 만들었다.
199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지만 서 단장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1993년 12월 31일과 1994년 1월 1일은 1년 차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간에 쫓기는 그룹입니다. 가족들에게 못할 짓이지만 오늘 일을 다 마치고 집에 갑시다.”
1994년 1월 5일.
관리단은 사용자 요구사항을 확정, 발표했다. 관리단이 요구하는 기준대로 업체가 제품을 만들면 우선 구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구매자인 한국이동통신은 ‘갑’이 되고 개발업체는 ‘을’로 관계가 명확해졌다.
이 부장의 말.
“사용자 요구사항에 이어 시험절차서를 만들라고 지시했더니 직원들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제품도 안 나왔는데 무슨 시험절차서냐는 것입니다. 15일 밤을 새워 800여개 항목을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각 업체 담당자 의견을 들어 1024개 항목을 4개월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관리단은 그해 3월 25월 각 업체 제품에 대해 예비시험과 상용시험 계획표를 각 업체로 보냈다. 이 계획에 따라 예비시험을 실시한 결과 삼성전자와 현대전자, LG정보통신 순으로 통과했다. 이들 업체는 계속 제품 시험을 했다.
7월 7일 한국이동통신 경영권이 선경그룹(현 SK그룹)으로 넘어갔다. 그해 11월 18일 한국이동통신 중앙연구소에서 윤동윤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CDMA 시스템과 아날로그 시스템, 유선전화(PSTN) 사이의 상호통화에 성공했다.
1995년 1월부터 업체별 상용시험을 시작했다. 상용시험에서는 LG정보통신이 108개 항목에 걸친 시스템 상용시험에 첫 번째로 통과했다. 2월에 삼성전자, 그리고 3월에 현대전자 순으로 시험에 통과했다.
1995년 3월 서 단장이 한국이동통신 사장으로 취임했다.
서 사장은 사장 직할로 한국이동통신 연구소 인력을 디지털사업본부로 개편해 이성재 부장을 본부장으로 발령했다. 본부 인력은 120명이었다.
그해 5월부터 서울 등 수도권 전역에서 시범운용을 시작했다. 관리단은 눈코 뜰 새 없이 뛰어 다녔다. 미국 출장도 무박 3일이나 1박4일로 다녀와야 했다. 5월 8일 LG정보통신이 가장 먼저 933개 항목을 통과해 1차 수도권지역 제품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6월 12월부터 17일까지 코엑스에서는 ‘95 정보통신전시회’가 열렸다. CDMA 이동전화 시연회가 이뤄졌다. 이 자리에는 경상현 정통부 장관 등이 참석해 시험통화를 했다. 서 사장은 시연회 전날 밤 관련 인력을 총동원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서 사장은 12일 아침 광화문 정통부에서 코엑스(KOEX)까지 이동하는 기자단 버스 안에서 CDMA 시연회를 개최했다. 서 사장과 기자단과의 통화는 목적지인 전시장까지 이동하는 내내 계속됐다. 통화품질도 기존 이동통신 기술보다 더 선명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1995년, 연말이 다가오자 한국이동통신 내부에서 서비스 시기 연기론이 나왔다. 마케팅 준비가 안 됐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성재 본부장은 전국에서 300명을 차출해 CDMA 단말기를 주고 인천과 부평 등지에서 1주일간 매일 100통화를 해 그 결과를 제출하도록 했다. 통화는 무제한이었다.
이 본부장의 말.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관련자료를 마케팅본부장이 통계를 집계하도록 했어요. 결과는 아날로그보다 100배는 낫다고 했습니다.”
그 무렵, 조정남 부문장(SK텔레콤 사장, 부회장 역임, 현 고문)이 이 본부장에게 물었다.
“이거 제대로 될까?”
이 본부장 대답이 걸작이었다.
“됩니다. 안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상용서비스를 며칠 앞두고 기지국과 단말기 소프트웨어에서 결함이 나타났다. 서 사장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밤새워 문제점을 찾고 있는데도 퀄컴 단말기에서 버그가 발생했다. 마침 퀄컴 기술진이 홍콩을 거쳐 한국에 왔다.
서 사장은 그들에게 “당신들을 인질로 잡겠다. 가족들에게 전화는 할 수 있다”며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그들은 성탄절을 서울에서 보내며 문제를 해결했다.
그해 12월 31일 최종 상용화 시험을 했다. 서울에는 주파수를 배정받지 못해 기지국 30개를 설치한 인천지역으로 갔다. 손길승 부회장(현 SK텔레콤 명예회장)과 조정남 부문장 등이 CDMA 통화상태를 놓고 내기를 했다. 통화가 계속되면 조 부문장이 이기고 끊기면 지는 것이었다.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전화가 끊기지 않았다. 그러자 손 사장이 차를 골목길로 몰아 계속 빙빙 돌았다.
조 부문장이 말했다.
“그만 돌고 이제 갑시다.”
조 부문장이 이겼다.
손 부회장 지갑을 조 부문장이 빼앗았다. 지갑 안에 260만원이 들어 있었다. 이 돈으로 고생한 현장 직원과 관리단에 선물을 사서 돌렸다.
CDMA 첫 상용화는 한국 ICT산업 위상과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한국이동통신은 1996년 1월 3일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 신세기통신도 4월 1일 상용서비스에 돌입했다. CDMA 첫 상용화로 가는 길에 관리단과 연구진 간 갈등도 뒤따랐다. 하지만 그것은 ICT강국으로 가기 위한 성장통(成長痛)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