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적정기술

100달러 노트북을 받아들고 환호하는 남미 학생들
100달러 노트북을 받아들고 환호하는 남미 학생들

 “전 세계 설계자는 그들의 시간 대부분을 구매력 있는 상위 10% 미만의 소수 소비자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폴 폴락)

 애플의 아이폰 열풍으로 시작된 스마트폰 대세론은 마치 곧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 사용자가 될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전 인류 중 스마트폰 사용자는 10% 미만이다. 휴대폰을 가진 사람 전부 합해도 전체 인류의 절반에 훨씬 못 미친다. 디스플레이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리얼 LED’라는 기술까지 진화했다. 하지만 LED는커녕 컬러TV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극히 소수다. 얼음이 예쁜 모양으로 나오고 각종 신기술 필터링 장치를 삽입한 정수기가 개발됐지만 마실 수 있는 식수가 근처에 없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나라도 있다.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삶을 편리하게 만든다. 하지만 편리함 만큼이나 소외도 키운다. 구매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스마트폰이나 LED 디스플레이는 아무런 편리함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불을 뗄 연료를 조금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기술, 현대적인 건설 자재 없이도 비가 쏟아져도 가재도구가 물에 젖지 않을 수 있는 건축 기술에 대한 필요성이 훨씬 높다.

 ◇최첨단 기술의 홍수 속에 주목 받는 적정기술=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은 10% 미만의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최첨단 기술과 달리, 그렇지 못한 90% 이상의 다수에게 필요한 기술이다. 첨단기술과 하위기술의 중간기술, 대안기술이라고도 불린다. 홍성욱 한밭대학교 적정기술연구소장(화학공학과)은 “적정기술을 기술 자체로만 이해한다면 큰 오산”이라며 “적정기술은 기술 이전에 하나의 ‘사고체계’를 의미하며, 이는 하나의 ‘철학’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설명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해당 기술을 사용할 때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그 사용이 환경이나 타인에게 가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했다.

 적정기술의 시작은 언제일까. 일부에선 인도의 간디를 꼽는다. 산업혁명의 발발로 영국의 값싼 직물이 인도에 들어와 인도 경제의 자율성을 해치자 직접 물레로 옷을 만드는 운동을 벌인 것을 적정기술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 ‘중간기술’의 개념을 제안한 영국의 경제학자 E F 슈마허는 규모가 작으면서 간단하고 비폭력적이면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기술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1966년 중간기술개발집단(ITDG)를 설립했다. ITDG는 ‘실용적 행동’으로 명칭을 바꾸고 지금도 활동 중이다.

 김정태 적정기술재단 사무국장은 적정기술의 요건으로 △현지의 필요를 해소하기 위해 특회 △노동력 절감이 아닌 인적자본의 활성화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용이성 △현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지속가능한 획득과 경제적 운용 가능성 등을 꼽았다.

 ◇기술이 아닌 철학에 바탕을 둔 적정기술들=페라라 디자인 회사가 고안한 ‘글로벌 빌리지 셸터(Global Village Shelter)는 한 채 50만원 미만의 비용이 드는 임시 주택이다. 1년 이상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튼튼하다. 조립도 손쉽다. 대형 건설사들이 참여했지만 현지 자재 부족과 높은 비용으로 공정이 늦춰지고 있는 도호쿠 대지진 피해 주민들의 임시주택은 한 채 비용이 6700만원에 달한다.

 아이티는 ‘재난의 나라’다. 지난해 강타한 지진 이전에도 허리케인 등 잦은 재난을 당했다. 지정학적 위치보다,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면서 대부분의 산림이 훼손된 탓이 크다.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학생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현지를 방문해 조사하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티의 주 수입원인 사탕수수 농사 뒤, 사탕수수 폐기물을 버리는 데 주목해, 사탕수수 숯을 만드는 공정기술을 주민들에게 전수했다.

 아프리카에는 몇 시간씩 걸어가 하루 먹고 요리할 물을 떠오는 마을이 많다. 자동차는커녕 변변한 수레 하나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물을 떠오는 것은 이만 저만 고역이 아니다. 어린이들까지 물 떠오기에 동원되지만 양이 충분치 않다. 물을 끌어오는 급수시설은 당연히 엄두를 못 낸다. 피에트 핸드릭스의 ‘큐 드럼(Q drum)’은 가운데가 뚫힌 원통에 줄을 매단, 기술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아이디어 발명품. 물통이 바퀴처럼 구르기 때문에 작은 어린이들이 자기 몸무게의 두 배가 넘는 물을 손쉽게 떠올 수 있다.

 IT분야에도 적정기술이 있다.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간의 정보격차를 줄이기 위해 개도국 어린이들에게 저렴한 PC를 공급하지는 취지로 시작된 OLPC(One Laptop Per Child) 프로젝트도 한 사례다. OLPC 프로젝트는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MIT 교수가 제 3세계 어린이를 대상으로 100달러짜리 랩톱을 보급하면서 시작됐다. 총 40개국 25개 언어로 제작돼 200만여 대가 보급됐다. OLPC 프로젝트 아시아본부는 한국인인 이재철씨가 이끌고 있다.

 ◇적정기술은 미래의 ‘지속가능성’ 담보=최근 3~4년 사이 우리나라에서도 적정기술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나 특허청 등 정부부처와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이 협력한 적정기술 연구개발(R&D)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김 사무국장은 “이미 세계 4위의 특허출원 국가이자 뛰어난 인적 자원 및 단계별 발전에 따른 다양한 과학기술 활용경험을 갖추고 있다”며 한국의 적정기술 중심국가로서의 가능성을 설명했다.

 최첨단 기술은 기술 자체로만 존재할 수 없다. 경제나 환경·에너지가 뒷받침해 줄 때 운용될 수 있으며 진보도 가능하다. 적정기술은 최첨단 기술이 미래에도 계속 진보할 수 있는 뒷받침 역할을 한다. 첨단기술을 아직 적용받지 못하는 90% 인류의 삶을 지속가능하고,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면서 그들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둔다.

 또 위기 시에는 오히려 선진국에 적정기술의 배려가 필요해 진다. 이를테면 일본 대지진 이후 아프리카 오지에서나 쓰이던 개인용 물 정수장치가 일본에 유입된 경우만 봐도 그렇다. 이렇게 본다면 ‘소외된 90%’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기술인 셈이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m

큐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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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개인 정수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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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 폐기물로 만든 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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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전환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세발 휠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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