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59>

 한미통신회담<2>

 

 약자의 비애(悲哀).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1989년 2월22일.

 한미통신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즉각 한국을 통신분야 우선협상국(PFC)으로 지정했다.

 칼라 힐스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날 “한국과 통신시장 개방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진전이 없어 미 종합무역법에 따라 한국을 통신 분야 우선협상국으로 지정, 이에 관한 보고서를 대통령과 미 의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무역대표부는 미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은 부가가치서비스 분야를 비롯, 정부조달 관행이나 투자, 표준 제도, 통신장비 수입관세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대응은 예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은 미국의 일방적인 통신시장 개방 요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미 무역대표부 권한은 막강했다. 국제 통상교섭을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미국 무역정책을 총괄 수립하고 집행하며, 불공정 무역행위에 관한 조사 및 보복 조치를 취했다.

 그 대표인 칼라 힐스는 초강경파였다. 그는 “세계 무역증진이 곧 미국의 국가 이익”이라는 어록을 남길 정도였다.

 미 무역대표부 대표를 물러난 그가 1995년 10월 한국에 왔다. 제2 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된 신세기통신의 지분 11.4%를 가진 미국 에어터치사 법률 고문자격이었다. 그는 청와대와 경제기획원, 상공부 등을 오가며 신세기통신에 TDMA방식을 허용해 달라고 압력을 넣었다. 정보통신부는 한마디로 이를 거절했다. 대표부 대표일 때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당당했다. 기업 법률고문으로 변한 그의 위상은 과거에 비해 초라했다. 세월 앞에는 그도 별 수 없었다.

 미국의 우선협상국 지정에 정부는 통상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움직였다. 한승수 상공부 장관(대통령비서실장, 부총리, 국무총리 역임, 현 김앤장 고문)을 4월 15일 미국에 파견해 우선협상국 지정을 적극 저지했다. 이어 조순 부총리(한국은행 총재 역임, 현 서울대 명예교수)도 5월 4일 미국을 방문해 “미국이 한국을 우섭협상국으로 지정할 경우 우려되는 점이 많다”며 지정 보류를 촉구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최영철 체신부장관(국회부의장, 통일부총리 역임, 현 서경대학교 총장)의 증언.

 “미국의 통신시장 개방요구는 무리한 게 많았습니다. 1990년부터 통신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했어요.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통신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는 없죠. 하지만 통신시장을 개방하되 단계적으로 한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외교 활동에 나선 것입니다.”

 최 장관의 계속된 회고.

 “노태우 정부는 1988년 5월 정부조직 개편을 위한 행정쇄신위원회를 출범시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논의 대상에 체신부를 다른 부처와 통합하는 안이 들어 있었습니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작고)가 위원장이었는데 세번이나 만나 절대 불가(不可)를 설명했습니다. 정보화 시대를 앞둔 마당에 체신부를 없애면 어디서 ICT 정책을 담당하느냐고 해서 두 번은 윤동윤 기획관리실장(체신부장 역임, 현 한국IT리더스포럼회장)과 같이 가서 부당함을 브리핑했고 한번은 독대해 말씀을 드렸어요.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끄느라 한미 간 통신시장 협상에는 상대적으로 집중하지 못한 측면이 있지만 수석대표인 박성득 국장(정통부 차관, 현 한국해킹보안협회 회장)이 논리적으로 미국 측에 잘 대응했습니다.”

 한국이 우선협상국으로 지정되면 어떤 불이익을 받는가.

 미국은 우선협상국 통신기기에 부과하는 관세 또는 무역협정의 일부 혹은 전부의 종료, 철회 정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또 해당 국가의 통신기기 구매를 중단할 수 있다. 이런 조치가 별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면 미국 대통령은 슈퍼 301조에 따라 통신 분야 이외의 분야에도 무역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배경에 대한 박성득 정책국장의 증언.

 “일본은 우리보다 일찍 미국의 요구를 수용했어요. 일본은 1984년부터 시외·국제전화시장을 개방했어요. 그에 비해 EC는 미국의 개방 압력에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어요. 미국이 EC를 겨냥하면서 한국도 개방 대상에 포함시켰어요. 한국을 만만하게 생각한 것이죠.”

 한국은 미국 측에 한국을 미국 법에 따라 우선협상국으로 지정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그런 만큼 우선협상국 지정을 철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미국은 한국의 이런 주장에 한국과 EC를 우선협상국으로 지정한 후 5월부터 협상을 시작하자는 입장을 전해 왔다.

 체신부는 그해 4월 10일 TF인 통신개방연구단을 출범시켰다. 연초 청와대 업무보고 시 밝혔던 계획이었다. 단장에는 체신부 문영환 전파연구소장(체신부 전파심의관, 기술심의관, 한국통신기술협회 사무총장 역임)을 임명했다.

 문 단장의 말.

 “미국의 통신시장 개방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TF를 구성한 것입니다. 체신부 내 조직이 아니라 통신개발연구원 소속이었습니다. 각국의 협상전략을 파악해 우리 측 대응논리를 연구했습니다. 당시는 미국이 강자였습니다. EC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으로부터 개방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EC측 자료를 구하기 위해 출장도 다녀왔습니다. 그들이 같은 입장이어서 그런지 자료협조를 잘 해주더군요.”

 체신부에서 공종열 서기관(정통부 정보통신정책국장 역임. 현 KMI 대표)이 파견근무를 했다.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성극제 박사(현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연구단에 합류했다. 그는 미 노스웨스턴대 경제학박사로 1987년부터 한미통신협상에 깊숙이 관여했다. 하버드대학 연구원으로 공부할 때인 1989년 2월 미국에서 열린 한미통신협상에도 참석했다. 그는 귀국해 체신부장관 자문관으로 발령받아 한미통신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윤창번 통신개발연구원 기획실장(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하나로텔레콤 회장 역임, 현 김앤장 고문)의 말.

 “연구원에서는 통신협상 전문가인 성 박사를 추천했습니다. 그는 장관 자문관으로 통신개방에 따른 논리 개발과 대응방안 마련 등 전천후 역할을 했습니다.”

 성 박사는 체신부 12층에 마련한 사무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김은주 전 국제전기통신 수석자문관이 그와 같이 일했다.

 한미 양측은 9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서울에서 제1차 통신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한미통신협상이 결렬된 지 6개월여 만이었다.

 연구단은 그해 여름, 미국 로펌에서 통상 전문 변호사를 선임해 한미통신회담에서 자문을 받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성 박사는 미 예일대 법학박사 출신인 신영무 변호사(현 대한변호사회장, 법무법인 세종고문)과 한국통신사업개발단장인 유완영 박사(오리온전기 사장, 한국전파진흥협회 부회장 역임) 등과 미국으로 건너갔다.

 성 박사의 증언.

 “워싱턴 DC에서 대형 로펌 4곳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한국이 우선협상국으로 지정됐는데 자문할 변호사를 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로선 파격적이었습니다. 비용은 한국통신(현 KT)에서 부담했어요. 제안서를 낸 변호사들을 호텔로 불러 면접심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을 선발했으나 한 사람은 AT&T 고문 변호사여서 계약 직전에 무산됐다. 미 컬럼비아대 법학박사 출신으로 워싱턴에서 국제 변호사를 일하던 권순엽씨가 발탁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뒤에 두루넷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회담을 앞둔 양측 속셈은 서로 달랐다. 미국 측은 하루빨리 통신시장을 개방하라는 것이었고 한국 측은 최대한 개방 시기를 연기하려 했다.

 회담 첫날인 9월 6일 상오 10시.

 체신부 회의실에서 만난 한국 측 수석대표인 박성득 체신부 통신정책국장과 미국 측 수석대표인 낸시 애덤스 미 무역대표부보(補)는 악수를 나누고 회담을 시작했다. 전임 미 측 수석대표인 피터 알가이어는 통신회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좌천됐다고 한다. 낸시 애덤스 대표는 당시 33살의 미혼이었다.

 박 단장은 미국 측에 한국을 우선협상국으로 지정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기존 입장대로 통신시장을 단계적으로 개방할 것임을 거듭 밝혔다.

 미 수석대표는 미국 종합무역법상 통신협상 시한이 1990년 2월 23일까지임을 거듭 강조했다. 만약 이때까지 한미 간에 원만한 통신시장개방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슈퍼 301조 발동은 피할 수 없다고 압박을 가했다.

 문을 열려는 측과 막으려는 쪽의 공방은 치열했다. 미국 측은 종전처럼 1990년부터 본격 통신서비스부문 개방을 요구했다. 한국 측은 1992년 하반기부터 개방을 검토하겠다고 맞섰다.

 양측은 서로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개방분야에 대한 개념정의를 중점 논의했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구체적 합의 없이 8일 회담을 끝냈다. 양측은 협상시한인 1990년 2월 23일 이전에 워싱턴이나 서울에서 통신회담을 열어 구체적인 시장 개방시기와 범위 등을 협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회담 중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회담장인 체신부 회의실 옆에 동시 녹음과 통역이 가능한 작은 방이 있었다. 한국과 계약을 맺은 미국인 테런스 포춘 변호사가 그 방에서 이어폰을 끼고 회담내용을 듣고 있다가 때마침 미국에 전화를 하러 나온 미국 측 대표단에게 발각이 된 것이다.

 한국 측 대표단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를 두고 미국 측은 도청사건이라며 극심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자칫 외교사태로 비화될 수 있었다. 한국 측은 그런 의도가 아님을 극구 해명해 사태는 무마됐다. 사소한 부주의로 국제적 망신을 당할 뻔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