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일 카를스루에에 있는 기술영향평가기관(ITAS)에서 마이클 레이더 박사 등 연구진과 지난 5월 30일 독일정부가 공표한 원전폐기정책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관심이 갔던 부분은 바로 이웃한 프랑스와 상반된 원자력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ITAS 연구진과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니 다음과 같았다.
먼저 정치적 배경의 차이점을 들 수 있다. 프랑스는 중앙집권적이고 테크노크라트(전문적인 기술관료) 중심적인 정책결정 과정을 보인다. 독일은 연방국가로 주요 정책결정이 합의방식을 거쳐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차이점은 녹색당의 존재인데 1960·1970년대 반전운동에 뿌리를 둔 녹색당은 원전폐기를 강하게 요구해왔다. 이번에 메르켈 총리가 공표한 원전폐기정책은 사실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 당시인 ‘2000년 합의’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엇갈린 프랑스와 독일의 운명도 상반된 원자력 정책의 형성과정에 한몫했다. 원자력 연구가 전후 초기만 하더라도 군사적 차원으로 수행됐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는 전승국으로서 원자력 연구가 자유로운 편이었고 결국 이를 토대로 핵무기 보유국가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원전기술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독일은 패전국으로 전후 초기 원자력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어려웠다.
양국 간 위험에 대한 관심 사안과 문제에 대한 대처방식이 다르다는 것도 언급할 만하다. 프랑스는 원자력보다 유전자재조합식품(GMO)의 ‘위험’에 대해 더 관심이 많지만, 독일에서는 원자력 문제를 다른 이슈보다 더 중요한 현안으로 다뤄왔다. 체르노빌, 스리마일, 후쿠시마 등 원전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도 프랑스에서는 안전문제를 개선하여 원전사고 위험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독일에서는 원전의 지속가능성 자체에 논의의 초점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측면의 국익 계산방식 차이다. 프랑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이미 원자력 분야의 선진국이다. 지구온난화 시기에 당분간은 원자력이 지속적으로 각광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프랑스로서는 그동안 축적한 기술우위와 수출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독일은 현존 에너지체계가 곧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신재생에너지를 비롯한 신기술 분야에서 최고 선도국이 되고자 한다. 독일의 원전폐기정책은 이러한 신기술 산업분야를 발전시키기 위한 인프라 성격으로서 전략적인 측면이 강하다. 원전폐기로 부족해진 전력을 원자력국가인 프랑스에서 구입하려는 독일의 행보를 두고 일종의 님비(NIMBY) 전략이라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을 정도다.
이렇듯 다른 정책들에 비해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기준이 명확해 보이는 과학기술정책도 국가가 처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리 형성됨을 알 수 있다. 과학기술과 사회는 결코 독립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은 채 특정 국가의 ‘정책’만을 수용하는 것은 무척 어려울 뿐 아니라 실제 정책 추진 시 실패 확률도 높아질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원자력정책에 관한 논의도 어느 특정 국가의 모델을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에 맞고 사회적으로도 충분히 수용 가능한 ‘한국형 모델’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김병수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 deeple@kistep.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