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60>

 한미통신회담<3>

 

 도전은 세상의 다른 문을 열게 한다.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유난히 진하던 1989년 6월 23일.

 프랑스 니스에서 체신부로 낭보가 날아들었다. 한국이 국제기기통신연합(ITU) 전권회의에서 관리이사국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이었다. 이 무렵 한국은 미국의 통신시장 개방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ITU는 세계 정보통신 분야 최고 정책결정회의체로 국제연합(UN) 산하기관이다. 체신부는 환호했다.

 정부는 이에 앞서 프랑스 니스 아크로폴리스에서 5월 23일부터 6월 29일까지 열리는 ITU 전권회의에 최영철 체신부 장관(국회부의장, 통일부총리 역임, 현 서경대학교 총장)을 수석대표로한 대표단을 5월 11일 파견했다. 대표단은 체신부와 외무부, 한국통신(현 KT), 데이콤,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 업계 등 10여명으로 구성했다. 최 장관은 23일 ITU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스웨덴 등 4개국을 순방하며 지지를 요청한 다음 5월 27일 귀국했다.

 한국 측 교체수석대표는 박성득 체신부 통신정책국장(정통부 차관,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이었다. 그는 최 장관 귀국 이후 현지에서 대표단을 지휘해 이사국 진출을 위해 각국 대표단을 돌며 지지를 호소했다.

 박 국장의 회고.

 “미국은 2월 한국을 우선협상국(PFC)으로 지정한 뒤 곧장 회담을 열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ITU 전권회의 참석을 이유로 회담을 연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한국 측 수석대표인 제가 프랑스에 가야 하니 회담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한미통신회담은 9월에 열리게 된 것입니다.”

 박 국장을 비롯한 대표단은 현지에서 한 달 이상 머물며 각국 대표단을 만나 지지를 요청했다. 한국의 이사국 진출 전망은 불투명했다. 동맹관계인 미국도 한국에 호의적이 아니었다.

 박 국장의 계속된 증언.

 “한국대표단은 아프리카와 동구권 등을 집중 공략했습니다.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지지세력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폈습니다. 아시아지역은 일본과 중국이 이사국 후보로 등록해 한국을 지지하는 나라가 거의 없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투표결과는 기적을 낳았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에 이어 10번째로 관리이사국으로 선출됐다. 임기는 4년이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한 단계 높인 쾌거였다.

 최영철 장관은 대표단이 귀국하자 그해 7월 11일 오후 체신부 대회의실에서 자축회를 열어 관계자 노고를 격려했다.

 ITU는 1865년 5월 17일 세계 전기통신표준화와 질서유지 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한국은 1952년 1월 31일 회원으로 가입했다. 한국은 이후 5년 연속 관리이사국으로서 ICT 분야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 지난해 10월 21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날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제18차 ITU 전권회의에서 2014년 제19차 ITU 전권회의를 한국이 유치했다고 밝혔다. 아시아 지역에서 ITU 전권회의는 1994년 일본에 이어 한국이 두 번째다.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2014년 ITU 전권회의 유치를 위해 2010년 10월 4일 멕시코 과달라하라를 방문, 각국에 전권회의 한국 유치 지지를 요청했다.

 2014년 한국 ITU 전권회의에는 세계 192개국 120명 이상의 장차관을 포함한 2500여명이 참석할 것으로 정부는 전망했다. 방통위는 이 기간 중 참석자들에게 ICT 발전상 및 미래비전 등을 보여주고 한국의 전통문화도 널리 알린다는 방침이다.

 방통위는 2014년 ITU 전권회의 개최도시는 ITU와 협의를 거쳐 오는 10월 ITU이사회에서 결정할 예정이다. 현재 거론되는 도시는 서울과 부산, 제주 등이다.

 다시 이야기를 한미통신회담으로 돌아가 보자.

 1989년 10월부터 한미통신회담이 재개됐다.

 한미통신회담을 앞두고 정부는 전략을 변경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은 시공을 뛰어 넘어 유효했다. 미국 자문변호사를 통해 미국 대표단이 요구할 협상 목록과 미국 측 협상 전략 등을 미리 파악했다. 이를 토대로 협상전략을 세밀하게 세웠다. 개방할 것은 개방하되 개방이 불가능한 것은 최대한 지연작전을 쓰기로 했다.

 한국 측은 그간의 수세적 태도에서 공세적 자세로 전환했다. 나름의 냉정한 셈법에 따른 것이었다.

 회담에서 핵심역할을 한 성극제 체신부 장관 자문관(현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의 말.

 “미국 로펌에 법률자문을 구하고 아울러 한국 측 입장을 미국에 알리는 로비도 했습니다. 미국 변호사에게 회담을 유리하게 진행할 유익한 자료를 많이 구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훈령과 회담 안건, 미국 측의 개방요구에 대한 대응전략을 마련했습니다.”

 미국 측의 협상전략을 파악하고 나니 그만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체신부는 10월 16일 오후 2시 회의실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한국 측 수석대표인 박성득 통신정책국장 주재로 열린 회의에는 문영환 단장(체신부 기술심의관, 한국통신기술협회 사무총장 역임)과 성극제 자문관, 유완영 한국통신(현KT) 사업개발단장(오리온전기 사장 역임) 등이 참석했다.

 10월 19일 통신망사업개방대책반장인 신윤식 체신부 차관(데이콤 사장, 하나로통신 회장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이사장) 주재로 경제기획원과 외무부, 상공부, 과기처, 조달청 등이 참석해 정부 대응책을 논의했다.

 한미 양측은 1989년 10월 26일부터 27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2차 통신회담을 열었다.

 한국 측에서는 박성득 수석대표를 비롯해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외무부, 조달청 등 6개부처 12명이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회담장소는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 무역대표부(USTR) 4층 회의실이었다.

 회담에서 한미 양측의 입장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양측은 국가 이익 앞에서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통신서비스와 공공구매, 표준화, 관세, 투자제한 등에서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렸다. 상호 입장을 확인하는 선에서 막을 내렸다.

 이 무렵, 신윤식 차관이 미 상공회의소 초청으로 10월 25일 출국했다.

 신 차관은 그해 11월 1일 미 상공회의소에서 ‘한국통신의 현황과 발전방향’을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10월 31일 오후 미 무역대표부를 방문, 201호에서 줄리어스 카츠 부대표와 만나 한국 측 통신개방 입장을 설명했다.

 한미 양측은 연이어 매달 회담을 열었다.

 3차 통신회담은 서울(12월 18~19일), 4차 회담은 하와이(1990년 1월 19~22일), 5차 통신회담은 워싱턴(1990년 2월 14~15일)에서 릴레이하듯 개최했다.

 정부는 1990년 1월 17일 하오 조순 부총리(한국은행 총재 역임, 현 서울대 명예교수) 주재로 외무, 상공, 체신, 과기처 등 통상대책 관계 장관회의를 열고 대미통상현안 대책방향을 논의했다.

 하와이에서 열린 제4차 한미통신회담도 양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의견접근을 보지 못했다. 미국 측은 통신서비스분야의 경우 경쟁대상서비스 범위 및 개방 시기, 시장접근조건, 국제VAN(부가가치통신망)서비스, 경쟁 보장장치 등 거의 모든 부문에 대해 한국 측 입장에 불만을 표시했다.

 한국 측은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 측은 우루과이라운드(UR) 통신서비스개방문제에 관한 결정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점을 들어 다자간협상에서 논의할 것을 강력히 주장,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통신기기 분야는 세부적인 기기표준제정절차, 외국시험성적서의 인정절차 등에 관한 논의를 했다. 공공구매 분야는 세부조달절차, 적용대상기관, 시행 시기 등에 대해 우리 측이 제시한 방안을 중심으로 협의했으나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한미 양측은 긴 줄다리기 끝에 5차 회담에서 부분 타결점을 찾았다.

 체신부는 회담에 앞서 미국의 통신 분야 우선협상국지정에 따른 협상시한인 2월 23일을 앞두고 기기표준 및 인증분야 등 각 분야에서 원칙적인 합의를 도출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5차 회담에서 한국 측은 통신서비스 중 데이터베이스(DB)와 데이터처리(DP)분야는 1990년 7월부터 개방하겠다는 협상안을 미국 측에 제시했다. 기기표준과 인증업무도 미국의 요구를 수용, 미국업체 참여를 보장키로 했다. 공공구매는 한국통신(현 KT)으로 한정하고 통신장비는 1993년부터 공개구매절차에 따라 내·외국 구별 없이 시장을 개방키로 했다.

 한미 양국은 2월 15일 서비스와 표준화, 정부조달 등 합의한 내용을 양해록(ROU)으로 작성, 교환하고 회담을 끝냈다. 양측 수석대표가 각각 양해록에 서명했다.

 양해록은 조약이나 협정과 같은 수준은 아니나 양국 당사 간 비공식 합의를 문서화한 것이어서 협정문과 같은 구속력을 갖는다.

 한미 양측이 통신시장 개방에 부분적으로 합의하자 미국 측은 2월 23일 한국에 보복조치를 취하지 않고 협상시한을 1년간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칼라 힐스 미무역대표부(USTR)대표는 이날 “미국이 전기통신시장 개방을 위해 지난 1년간 한국 및 유럽공동체(EC)와 가져왔던 협상이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다”며 “1년간 협상을 연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힐스 대표는 “한국은 미국에 통신시장을 개방하기 위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완전한 시장개방을 위해서는 해결해야할 일들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은 미국과 통신시장 개방 협상에서 1년이란 시간을 벌어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미국 측의 기본 입장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단지 협상시간을 연장했을 뿐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