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중반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는 비상이 걸렸어요. 경영진이 미국 통신사업자 관계자들과 내년 출시 휴대폰을 협의한 뒤였죠. 통신사는 하나같이 안드로이드폰을 생산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 내년 라인업은 일반 피처폰이 90%를 차지했습니다. 나머지 10% 스마트폰도 노키아 심비안폰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폰이었습니다. 결국 삼성은 중소 소프트웨어(SW) 업체에 SOS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만든 것이 ‘갤럭시S’입니다. 삼성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는 날, 한 신문사 1면에 LG전자 임원 인터뷰가 실렸죠. 헤드라인은 ‘스마트폰 아직 시기상조다’였습니다.”
삼성전자 갤럭시S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중소업체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휴대폰 강국 한국이 스마트폰 충격을 얼마나 안이하게 받아들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IT코리아가 ‘슬로우 늪’에 빠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업과 정부가 ‘IT코리아’에 도취해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에 둔감했다는 지적이다.
구글의 모토로라모빌리티 인수, HP의 PC사업부 분사 등 끊임없이 도전하고 난관을 극복하려는 ‘브레이크스루(breakthrough) 전략’이 사라진 결과라는 것이다. 애플이 맥 컴퓨터 사업이 난관에 봉착하자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TV’ 등으로 끊임없이 승부수를 던진 것과도 대조적이다. 국내 기업에는 이 때문에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이 한 때 유행처럼 회자됐다.
서기만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은 그동안 2등 전략은 나름대로 성공했다”며 “이젠 1등을 추구할 새로운 혁신그룹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모험 정신의 부재는 단기 실적에 따라 평가받는 우리 대기업의 인사 프로세스와 무관하지 않다.
대기업 한 임원은 “회사 내부에서 요즘 유망한 기업 인수(M&A)를 적극 검토 중이지만 실행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며 “불확실성을 담보한 M&A에 섣불리 진행했다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패러다임 변화를 못 읽은 것도 치명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무선 인터넷 혁명을 단순한 유선의 확장으로 본 과오를 범했다는 것이다. 24시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은 산업 생태계를 180도 바꿔놓았다. 개방과 공유의 소설네트워크서비스(SNS)가 각광받는가 하면 무료 또는 저가에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앱스토어’라는 개방형 생태계도 부상했다.
수직계열화를 통한 ‘닫힌 생태계’를 고수하면서 ‘열린 생태계’라는 변화의 물결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휴대폰 업계뿐만아니라 국내 통신사업자들도 피처폰 시절 단힌 콘텐츠 수급 전략에 연연하다 ‘앱스토어’ ‘안드로이드 마켓’ 등 열린 플랫폼에 일격을 받은 양상이다.
정부의 뚜렷한 비전과 실행력 부재도 IT코리아 엔진을 식혔다는 비판이다. 정부의 IT정책 거버넌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정부와 산업계로 이어지는 ‘이슈 파이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IT업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DJ정권 시절 IMF 위기를 타개한 ‘IT뉴딜’이 MB정권 초반 경제위기와 맞물려 ‘SW뉴딜’ 형식으로 제기됐지만 실행력은 크게 떨어졌다. 1인 창조기업 육성·스마트워크 등 시대 흐름을 반영한 정책은 생산됐지만, 용두사미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박영선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IT 컨트롤타워가 없어지면서 중소기업과 1인 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책이 사라졌다”고 꼬집었을 정도다.
장지영기자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