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웍스’는 미국 델러웨이대학교 공대의 박사과정생이던 웨인 웨스트먼과 지도교수 존 엘리야스가 1998년 설립했던 벤처 회사다. 이들은 ‘자판이나 마우스 없는 PC 조작’을 콘셉트로, 패드를 만지는 것만으로 조작이 가능한 기기를 속속 내놨다. 하지만 아이디어와 기술의 우수함에 비해 상품성과 마케팅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러나 지금 이 두 창업자는 대기업의 임원이다. 소속사는 애플이다.
핑거웍스의 기술을 유심히 지켜봤던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이 회사를 인수했다. 그리고 핑거웍스의 기술을 아이폰의 터치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 데 투입했다. 결과물로 나온 게 멀티터치 기술이다. 이 인터페이스는 애플의 제품에 ‘직관적’이라는 형용사를 따라다니게 만든 결정적인 요소다.
핑거웍스를 인수하고 3년 뒤인 2008년 애플은 임직원 150명, 설립 6년차인 팹리스반도체 벤처기업 ‘PA세미’를 2억7800만달러의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당시 이 인수의 목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쏟아지는 가운데 시장분석업체 크리에이티브스트래지스의 팀 바자린 컨설턴트는 “반도체 기술 확보가 애플의 혁신적 컨버전스 기기를 개발하는 능력을 확장시켜 줄 것”으로 전망했다.
2010년 1월,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를 공개하며 깜짝 놀랄만한 발표를 했다. “우리가 만든 칩(A4)이 들어갔다”는 것. 그 동안 외주를 주던 방식에서 자체 개발로 선회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PA세미 인수가 있다. 애플이 다양한 소프트웨어 구동에 최적화된 칩을 설계해내면서, 아이폰3G에 자사 칩을 공급하던 기업들은 파운드리(위탁생산) 수주 경쟁을 벌이는 신세가 됐다.
◇애플과 구글, 핵심 경쟁력 외부서 왔다=이처럼 애플은 자사의 핵심 기술력으로 꼽히는 터치 인터페이스와 자체설계 칩을 M&A를 통해 얻었다. 모두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은 신생 벤처기업이 대상이었다. 애플은 지난 1997년 이후 12년간 15개의 벤처기업을 인수했다. 지난해에도 앱 전문업체 ‘시리’와 반도체 설계회사 ‘인트린시티’를 사들였다. 1년에 하나 이상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력, 인재들을 M&A로 흡수하고 있는 셈이다.
모토로로모빌리티를 125억달러에 사들이며 세상을 놀라게한 구글도 M&A 분야의 큰 손이 된지는 오래다. 검색엔진으로 출발한 구글이 종합 인터넷 서비스에 모바일 운용체계(OS)까지 만드는 회사로 클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0년간 100여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기업을 인수했다.
구글의 기업개발 담당 부사장 데이비드 로위는 한 인터뷰에서 “공격적인 M&A 자세를 계속 견지할 것”이라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보유한 잠재적 가치가 높은 기업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창업자들이 구글에 온다고 기업가 인생이 끝나는 게 결코 아니며 지원 속에 더 높은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글의 핵심 모바일 광고플랫폼인 ‘애드몹’은 2009년 11월 7억5000만달러에 인수한 회사 이름이다. 한국에서만 애드몹을 탑재한 애플리케이션의 페이지뷰가 하루에 1억 건을 넘는다. 2006년 200만달러에 인수한 디마르크브로드캐스팅과 2007년 31억달러에 사들인 더블클릭은 구글의 또 다른 광고플랫폼인 ‘에드센스’로 통합돼 운영 중이다.
이 외에도 지난해 2월 인수한 온투테크놀로지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자사 웹엠(WebM) 포맷에 최적화된 비디오 코덱 기술을 디자인하고, 페이스북 써드파티 개발사였던 슬라이드닷컴을 지난해 8월 인수해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SNS ‘구글플러스’에 보탰다. 가장 대중화된 클라우드 서비스인 ‘구글 독스’에는 2007년 6억2500달러에 사들인 포스티니의 기술이 적용됐다. 애플과 구글은 향후 확대될 특허 전장에서도 각각 노텔(6000여건)과 모토로라(1만7000여건)의 피인수 특허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실리콘밸리, 기술·인재 위한 M&A 전쟁 중=이 두 회사 외에도 대형 컴퓨팅·소프트웨어 기업들도 M&A를 통한 경쟁력 강화에 한창이다. 관계형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로 시작한 오라클이 2005년~2010년 사이에만 44개 기업을 인수하며 기업용 패키지 SW 전 분야를 아우르는 강자가 됐다. MS는 스카이프를 사들이며 통신 시장에 뛰어들었다.
컴퓨팅 분야에선 지난해 HP가 치열한 인수전 3PAR를 23억5000만달러에 사들이며 스토리지 비즈니스를 한 차원 업그레이드했다. 델도 이에 맞서 컴펠런트를 9억6000만달러에 인수했다. EMC는 그린플럼을 사들여 빅데이터 분석 시대에 대비했다.
한편 페이스북·징가와 같은 신생 실리콘밸리 스타 기업들은 M&A를 통한 인재 모시기 경쟁에 한창이다. 페이스북은 23일(현지시간) “올해 20개 회사를 인수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마크 저커버그는 ‘제2의 트위터’로 불리던 ‘프렌드피드’를 인수하며 “우리가 원한 건 프렌드피드가 아니라 창업자 브렛 테일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인수(acquisition)와 고용(hire)를 합성한 ‘acqhired`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