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길주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 kcmoon@kist.re.kr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요즘 무척 바쁘다. 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개발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해졌다. 또 자기 분야 외에도 많은 것들을 알아야만 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만 알고 실험에 몰두하던 과거에 비해 세상은 너무도 복잡해졌고, 과학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요구도 그만큼 더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는 우리 과학자들이 더 이상 나의 연구에만 몰두하는 편안함(?)을 누릴 수 있게 놔두지 않는다. 과학자가 자기 분야의 전문성을 이유로 유행에 둔감한 것을 이해받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사회의 트렌드를 앞서 이끌어 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 트렌드 선도자들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관심을 두는 것처럼 세상에 필요한 과학기술을 먼저 인식하는 능력이 중요시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과학자들이 트렌드 이끌어 나가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창조해야 하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던 힘든 시기였지만 과거 우리 과학기술인들의 목표는 오히려 분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진 과학기술을 빨리, 잘 따라갈 것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최대한 신속히 습득해 우리 체질에 맞게 바꾸고, 한 단계 발전시켜 시장에 내놓는 것으로 큰 찬사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도 세계 과학기술계에서 더 이상 뒤따르는 자가 아닌 이끌어가는 자로 그 입지가 바뀌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빨리 가는 과학자’가 아닌 창의력과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창조적인 과학자’가 필요하다.
이 같은 시대 흐름에 맞춰 KIST도 연구자의 창의력 발현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구내 도서관에 인문학 코너를 강화하고 있는데 구성원의 호응이 매우 높다. 과학자에게도 이제 자기 분야의 전문지식 외에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해졌음을 많은 구성원들이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숙제는 잘 하는데, 출제는 잘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시하는 일은 잘 해내지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일은 서투르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한국인은 지구상에서 자기 언어를 독창적으로 만들어 쓰는 몇 안 되는 민족 가운데 하나고, 전쟁의 폐허에서 반세기 만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기적을 이루어낸 민족이다. 단순한 모방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창의력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플의 CEO 스티븐 잡스는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애플이 있다. 세계 유수의 IT 업체들이 기술을 앞세워 경쟁하지만 이를 압도할 힘은 인문학에서 나온다”고 했다. 바야흐로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연구자들이 미래를 이끄는 시대가 온 것이다. 모방을 잘해온 우리에게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그동안 활용할 일 없었던 우리 안의 창의력을 일깨울 기회가 온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이 시대의 과학자는 고달프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 고달픔만큼 더 큰 가능성이 열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