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마이크로네시아 연방공화국(FSM). 한국에서 비행기로 6시간 정도 떨어진 이곳은 1년 내내 무더운 열대 기후 지역이다. 적도 바로 위 북위 7.27도에 위치해 연평균 기온이 29℃에 달하며 여름철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태풍의 진원지다. 특히 마이크로네시아 4개 주 가운데 축(Chuuk)주는 아름다운 산호초와 침몰선으로 유명한 스쿠버 다이버의 천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에 강제 동원된 한국인 3000명이 미군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축주에서 가장 크고, 많은 사람이 사는 웨노섬. 괌에서 비행기로 2시간 거리인 이곳에 마이크로네시아를 대표하는 최고 명문 세비어 고등학교(Xavier High School)가 자리 잡고 있다.
1953년 개교한 세비어 고등학교는 마이크로네시아 예수회가 운영하는 4년제 사립 남녀공학이다. 전교생이 170명 정도로 축, 코스래, 팔라우, 마셜제도 등 수백개 섬나라에서 매년 가장 우수한 인재가 모여든다. 이들은 4년 교육 과정을 마친 후 70% 이상이 미국 주립대 등으로 진학한다. 대학을 나오면 국제기구 등에서 일하거나 고국으로 돌아와 지역 발전을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한다. 학교 운동장에 팔라우, 마셜제도연방공화국, 마이크로네시아 국기가 나란히 게양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비어 고등학교가 글로벌·지역사회 리더 양성을 위해 강조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과 ‘창의성’이다. 지식 전달과 학습 자체보다는 고급 수준 지적 능력을 기르는 데 집중한다. 창조적 예술 활동과 함께 기술, 지식, 그리고 아이디어와 문제를 탐구하는 태도는 이 학교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다. 사회적 이슈에 자신만의 의식을 가지고 일상적인 상황에 논리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하기.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을 지닌 사람과도 효율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 배양. 세비어 고등학교가 추구하는 1차적인 교육 목표다.
이런 목표를 위해 교사는 학생의 자발적인 발표와 토론을 유도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영어와 제2 외국어로 말하기, 읽기, 쓰기는 기본이다. 자신이 설계한 인생 목표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면접은 학교 입학을 허락받는 필수 관문이다. 수업 또한 교사가 일방적으로 내용을 설명하거나 진행하는 방식이 아니다. 절반 이상은 학생이 직접 발표하고 토론한다.
태평양이 훤히 보이는 세비어 고등학교 캠퍼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구축한 요새로 통신부대가 사용하던 곳이다. 미군 폭격을 견뎌낼 수 있도록 두께가 50㎝를 넘는 철근 콘크리트 벽으로 지어졌다. 지금도 학교 건물 곳곳에는 과거 전쟁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직 전기 공급이 제한적이고 섬 전체에 TV방송이 없다. 당연히 컴퓨터와 인터넷 등 첨단 정보기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일반 휴대폰 통화도 불가능하다.
그 대신 세비어 고등학교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학생회실에서 치열하게 토론을 벌인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공간에 섬마다 특징 있는 민속집을 지어 놓고 조용히 기도하거나 생각하는 장소로 쓴다. 학교 도서관 벽에는 ‘Still & Read Up!’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조용히 생각하고 열심히 책을 읽어 사고(思考) 수준을 높여 나가자는 의미다.
실제로 컴퓨터, 휴대폰 등 디지털기기는 우리의 깊은 사고를 도와주기보다는 방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웹 전문가 제이콥 닐슨이 232명을 대상으로 숙독(熟讀) 능력을 실험한 결과 대상자 가운데 불과 6명만이 웹 사이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차분히 읽어나갈 수 있었다. 나머지는 웹 사이트 한 편에 있는 간단한 다른 단어나 서체 변화 등에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제이콥 닐슨은 추가 연구를 진행해 10대가 어른보다 온라인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가는 속도는 더 빠르지만 주의를 집중하는 시간은 훨씬 짧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그냥 넘겨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실험 결과는 가끔씩이라도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디지털기기를 멀리하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세비어 고등학교에서 자원봉사단으로 과학을 가르치는 에밀리 페론 교사는 “TV와 인터넷 없는 환경이 처음엔 조금 답답했지만 지금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며 “주변 자연 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학생들과 집중력 있게 공부하는 데 오히려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축(마이크로네시아)=
◇창조적 사고를 자극하는 10가지 방법
1.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도록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놀이보다는 자유놀이에 집중하라
2. 제한된 환경과 범위에서 측정한 결과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마라
3. 교사와 책 대신 정보통신 기술에 집착하는 것은 금물이다.
4. 독창적이면서 상상력이 풍부한 사고를 기르기 위해 창조적이면서 합리적인 주제를 강조하라.
5.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숙제를 줄이는 대신 상상력이 깃든 자유놀이를 하라
6. 바쁜 부모가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7. 부모에게 더 많은 한도를 정하고 가상의 교류를 줄이도록 권장하라
8. 아이를 집에만 가둬놓은 채 육체적인 활동을 제한하는 안전 강박증을 버려라
9. 모든 읽기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컴퓨터, TV 등 미디어에 신경을 쓰라
10. 휴대폰을 포함한 디지털기기에서 나오는 정보와 사고방식이 부모와 교사가 주는 교훈과 가치를 희석시키지 못하게 막아라
출처: 리처드 왓슨 ‘퓨처 마인드’
◇‘열대해양체험프로그램’
섬 주변 산호초가 224㎞에 달해 산호초 보호국으로 지정받은 마이크로네시아 축주에는 우리나라 한·남태평양해양연구센터(KSORC·센터장 박흥식)가 있다. 우리 열대 해양자원 개발 전진 기지로 남극 세종기지, 북극 다산기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외 과학기지로 꼽힌다.
KSORC는 산호초 등 기초 해양 생태계 및 환경 모니터링, 열대 생물과 서식지 연구, 기능성 생물 생산, 신재생 복합에너지시스템 개발, 이산화탄소 증가에 따른 해양 산성화 연구 등 다양한 연구를 수행 중이다. 실제로 산호초 해역은 바다에서 생물 다양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해양 생물이 0.4%에 불과한 국내에서 불가능한 여러 생태 연구를 KSORC가 진행한다. 미래 자원 확보도 센터의 주요 역할이다. 이미 ‘바이오 디젤’을 생산하기 위한 미세조류 배양에 성공했고, 바다 생물에서 항암·항산화 효과가 있는 천연 물질도 70가지 넘게 추출했다. 또 센터 앞바다에 흑진주를 대량 양식하는 조개 양식 농장도 가꾸고 있다.
지난달 20일부터 28일까지 9일간 이 곳 해양연구센터에 우리나라 미래 과학 꿈나무가 방문했다. 한국해양연구원이 2007년부터 5년째 진행해온 ‘2011년 열대해양체험프로그램’ 참가자들이다. 중·고등학생으로 구성된 참가자들은 해양연구센터에서 다양한 해양체험과 과학실험을 진행했다. 스킨스쿠버로 물고기를 잡아 해부하기, 체험다이빙으로 바닷속 산호 관찰하기, 흑진주조개에 핵 삽입하기, 플랑크톤을 채집해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맹그로브 숲 탐험하기 등 날마다 정해진 주제에 따라 해양체험과 과학실험이 어우러진 생생한 교육을 직접 체험했다. 특히 모든 프로그램 과정은 현지 연구센터에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박사급 연구원이 직접 강사로 나서 진행해 현장감과 흥미를 더했다.
박흥식 센터장은 “열대해양체험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이 우리나라 해양과학기술 발전상을 직접 체험하고 해양과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함으로써 미래 과학도로서 자긍심과 도전의식을 갖게 되길 바란다”며 “현지 교류 활성화 차원에서 매년 한두 번씩 센터 주변 현지 초·중·고 학생들과도 비슷한 내용의 해양체험 학습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상돈기자 sdjo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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